[시온의 소리] 마음의 소리를 듣는 법

입력 2020-07-23 00:03

“양치기 소년은 왜 거짓말을 했을까.” 한 드라마 속 인물이 묻는다. 아, 미처 질문해 보지 못했던 거다. 그동안 이 동화를 읽은 대부분의 어린이가 마음에 새기는 교훈은 자명했으니까. ‘거짓말을 자꾸 하다 보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진실을 말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그런데 ‘사이코지만 괜찮아’라는 드라마 속 동화작가 문영은 거짓말 자체보다 목동이 거짓말을 한 이유에 주목해 이렇게 답했다. “외로워서, 나 좀 봐 달라고. 나랑 놀아 달라고….”

문득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가장 좋은 의사소통 방법은 솔직한 것이다. 종일 들판에서 양들하고만 지내는 것은 너무 심심하다고, 가끔 찾아와 말동무해 줄 친구가 혹시 없겠냐고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봤다면. 하지만 동화가 그렇게 전개된다면 그건 알퐁스 도데의 소설 ‘별’ 이야기가 된다. 자신이 늘 꿈꾸어오던 아가씨가 어느 날 불현듯 눈앞에 나타나 밤새 낭만적인 시간을 보낼 확률이 실제로 얼마나 될까. 그러고 보니 동화 ‘양치기 소년’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동네 사람들을 움직일 권력도, 부도, 권위도 가지지 못한 소년으로서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사람들을 모을 수밖에.

아니, 명색이 기독교윤리학자라는 사람이 지금 수단으로서의 거짓말을 정당화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외로움이 이유라고 거짓말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늑대다, 늑대가 나타났다” 외친 목동의 말에 속아서 한걸음에 달려왔던 동네 사람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표면상의 외침 말고 마음의 소리를 읽어준 사람이 있었다면, 목동의 반복적인 거짓말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순번제로 목동과 놀아주겠다며 자발적으로 조를 편성할 가능성은 거의 없겠지만, “네가 많이 외롭구나. 혼자 무서웠구나.” 이렇게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외로움의 반은 채워지는 법이다.

사실 우리는 자주 마음과 다른 말을 한다. “언제 밥 한번 같이 먹죠.” 진심보다는 인사치레이기 십상이다. 짜장면이 싫어도 어려운 어른 앞이라면 “저 짜장면 좋아해요”라고 웃는 낯으로 답한다. 이 정도는 애교다. “교수님,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한창 학기 중에 듣는 말이라면 제대로 번역기를 돌려야 한다. “학점 잘 주세요.” 다른 의미를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기에 편파심이 발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때론 세심하게 살펴야 제때 도움을 줄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아프지 않습니다.” 책임감이든 성과주의이든 열이 나고 몸이 안 좋은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 미련퉁이처럼 일만 하는 부하직원의 말은 마음과 다를 수 있으니. 어디 그뿐이랴. 발화하지 않고 오래 묵혀둔 미움, 분노, 원망 등은 어느 날 갑작스레 분출돼 너와 나의 관계를 순식간에 단절시키기도 한다.

하, 어렵다. 어떻게 하면 표면적인 말과 다른 그의 의미를 제대로 읽어낼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비언어적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얼른 도망가. 너라도 살아.” 말은 이렇게 하면서 내 옷을 꼭 쥐고 바들바들 떨고 있다면, 미안해서 나를 붙잡지 못하는 너의 마음의 소리는 필시 “나 무서워, 내 곁에 있어 줘”이겠지. 어디 마음만 그럴까. “밥 먹고 왔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를 내는 청년에게 권해 함께 먹는 밥 한 끼가 그날 그 청년의 첫 끼일 수도 있는 일이다.

결국, 타인의 존재 신호에 집중해야 마음의 소리를 읽을 수 있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상황이나 전제나 억압에 의해 명시적 말이 마음과 다른 사람들을 자주 접하다 보니, 이런 노력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는 하나님의 시선이기에 시절 불문하고 그리스도인의 덕목이기도 하다.

백소영 강남대 기독교학과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