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청장과 방송통신위원장, 통일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이번 주에 잇따라 열렸고 오는 27일에는 국가정보원장 후보자 인사청문회가 진행된다. 인사청문회는 후보자의 업무능력과 전문성, 도덕성 등을 검증하는 중요한 제도지만, 이 제도 자체가 요식 행위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인사청문회 정국 때마다 끊이지 않고 있다. 검증 과정에서 후보자의 중대한 결격 사유가 드러나도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할 경우 이를 견제할 방법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전임자인 조국 전 장관을 비롯해 무려 23명에 달하는 장관급 인사들이 검증 과정에서 야당의 강한 반대로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이 불발됐지만 결국 임명됐다. 전문가들도 인사청문회 제도의 요식화에 우려를 표하며 개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대통령이 임명 강행하면 그만
박지원 국가정보원장 후보자는 군 복무 중 단국대에 편입해 졸업한 이력이 드러나면서 ‘황제 복무’ 의혹이 불거졌다. 박 후보자는 1965년 4월 군에 입대했고, 1967년 9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다. 그런데 대학 편입 시기가 이와 겹친다. 1965년 9월 단국대에 편입한 뒤 1967년 2월 졸업해 3학기 만에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박 후보자는 고액후원자로부터 5000만원을 빌린 뒤 5년간 이자 1300만원을 포함해 원금을 갚지 않은 문제도 도마에 올랐다. 정치자금법 위반 소지가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지만 박 후보자 측은 “매년 국회 공보에 채무로 명확히 신고했다”고 해명하며 다음 달 27일 원금과 이자를 모두 갚겠다고 밝혔다.
이인영 통일부 장관 후보자는 지난 23일 인사청문회에서 아들의 주세법 위반 및 스위스 유학 ‘부모 찬스’ 의혹, 병역면제 경위 등을 놓고 야당 의원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미래통합당 관계자는 24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부적격으로 보고 있는 박 후보자의 청문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아도 문재인 대통령이 임명을 강행하면 사실 야당은 막을 방법이 없다"며 "문재인정부는 조 전 장관의 경우처럼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여론이 악화돼도 눈치를 보지 않고 임명을 밀어붙였다"고 말했다.
인사청문회법에 따르면 임명동의안은 제출된 날부터 20일 이내에 인사청문을 마쳐야 한다. 지난 8일 청와대로부터 인사청문 요청안을 송부받은 국회는 27일까지 인사청문경과보고서를 청와대로 보내야 한다. 국회가 송부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은 10일 이내 기한에서 재송부를 요청할 수 있다. 국회의 재송부 여부와 상관 없이 대통령은 임명을 강행할 수 있다. 문재인정부는 통상 재송부 기한을 짧게 설정한 뒤 기한이 지나면 바로 임명했다.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23명 임명
문재인정부 들어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된 장관급 인사는 23명이다. 박근혜정부(10명)나 이명박정부(17명) 때보다 많다.
올해 초 임명된 추 장관은 검증 과정에서 아들의 군부대 미복귀 무마 의혹과 피트니스클럽 무료 이용 의혹 등이 제기됐다. 당시 야당은 후보자가 장관직을 수행하기에 부적절하다고 판단해 청문보고서 채택에 참여하지 않았다.
조 전 장관의 경우에도 사모펀드 투자 문제와 자녀 관련 특혜 의혹 등으로 야당의 공세에 시달렸다. 논란은 일파만파로 커져 국론 분열까지 불렀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임명을 밀어붙였고, 조 전 장관은 임명 35일 만에 물러났다.
이미선 헌법재판관은 주식 과다 보유·거래 의혹 때문에 야당이 청문보고서 채택을 거부했다. 문재인정부 출범 후 교체된 헌법재판관 8명 중 4명이 청문보고서 채택 없이 임명됐다.
특혜 진료 의혹 등이 제기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과 과거 부적절한 SNS 언행으로 비판받은 김연철 전 통일부 장관도 청문보고서 없이 장관이 됐다.
국회의 판단 존중, 제도 손질 필요
결국 야당의 반대가 극심해 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되더라도 인사권자인 대통령이 결심만 하면 후보자가 임명될 수 있는 구조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인사청문회법을 개정해 '대통령은 인사청문경과보고서 결과를 존중한다'는 내용을 추가해 대통령과 국회 간의 상호 존중을 명문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대통령이 청문보고서 채택 불발이나 부적격 결과를 존중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치문화가 조성돼야 한다"며 "과거엔 대통령이 재송부 기한을 길게 주고 설득하는 노력이라도 했는데, 문재인정부는 그런 노력조차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사청문회 자체가 요식 행위로 굳어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국회에서 청문보고서 채택이 불발됐을 때 대통령이 이를 존중하는 게 바로 협치"라고 강조했다.
인사청문회 제도 자체의 대대적인 손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크다. 박상병 인하대 정책대학원 초빙교수는 "현재 인사청문회는 후보자를 공격하고 만신창이를 만들고 있는데 여야를 떠나 굉장한 낭비"라며 "능력과 무관하게 도덕군자만을 고위 공직에 임명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인사청문회를 분리해서 기본적인 도덕성 검증은 명확한 기준을 세워 청와대에서 마치고, 정치적 자질과 정책 역량 검증을 청문회에서 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인사청문회를 공직윤리청문회와 공직역량청문회로 분리하는 내용의 인사청문회법 개정안을 최근 발의했다. 과도한 신상털기나 흠집내기가 이뤄질 수 있는 공직윤리청문회는 원칙적으로 비공개로 하고, 공직역량청문회에서 자질·역량 검증에 집중토록 한다는 게 골자다. 홍 의원은 "인사청문회가 정쟁 도구로 변질되면서 국회 파행이나 공직 기피, 정치 불신을 조장하는 부작용도 크다"며 "인사청문회 정상화는 최우선적인 정치 개혁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