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석창우 (10) 수업 중 갑자기 배 아파 “화장실 좀 같이 가 주세요”

입력 2020-07-24 00:04
1997년 서울시서예대전에 출품해 특선을 받은 작품. 성경 잠언 29장 1~5절 말씀을 담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도곡 김태정 교수로부터 강의를 들었다. 김 교수는 2019년 12월 돌아가셨는데 한국서예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내고 대구예술대 서예과 교수로 계셨던 분이다.

혼자 다니는 나를 위해 여태명 교수가 아는 수강생 한 분을 소개해주셨다. 그는 내 가방도 손수 내려주고 하며 내가 공부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여러모로 도와줬다.

하루는 갑자기 배가 아팠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 평소 도움을 주던 분에게 말도 안 하고 뒤쪽 줄 끝에 있는 모르는 사람에게 갔다. 한창 열심히 강의를 듣고 있는 그분에게 화장실을 좀 같이 가 달라며 부탁했다. 그는 당황해하면서도 나를 따라 나와 화장실까지 같이 가주셨다. 오주남 선생이었다. 그는 당시 서예와 서각을 공부하고 계셨는데 이 일이 인연이 돼 10년 동안 서울과 지방에서 열리는 각종 전시회 때마다 나와 함께 다니며 내 도우미가 돼주셨다. 훗날 오 선생은 당시 강의를 듣던 그 많은 사람 중에 끝에 있는 사람도 아니고 다른 줄의 끝에서 두세 번째 있는 자기를 어떻게 선택했느냐고 물어봤다. 자기는 태어나서 한 번도 남을 따라 화장실을 간 적이 없을뿐더러 뒤처리를 도와준 적도 없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이분은 하나님이 내게 보낸 천사가 아닌가 싶다.


그 후 1년간의 강의가 끝나갈 때쯤, 김 교수가 나를 따로 부르셨다. 자기 집으로 매주 한 번 와서 이론 공부를 더 하라고 권하셨다. 날 헌신적으로 도와준 오 선생도 같이 오라고 해서 우린 매주 토요일 오전 8시면 김 교수 댁에 갔다. 그곳에서 두세 시간 동안 예술이론과 세계 유명 작가들의 작가관을 배웠다. 김 교수는 우리가 작업해 온 작품들을 보면서 설명도 해주셨다. 김 교수의 열정적인 강의 아래 2년을 넘게 오 선생과 같이 공부했던 그 순간은 예술 이론에 목마른 우리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수업들로 채워졌다.

나중에 오 선생이 사정이 생겨 같이 공부를 못하게 된 후론 조영철 선생과 같이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조 선생은 경기도 양평 용문면에서 카페를 운영하며 서각과 도자 공방을 하는 작가였다. 그와 1년 반을 넘게 같이 수업을 들을 때쯤, 김 교수가 대구예술대 서예과 교수로 부임하시면서 행복했던 예술이론 교육도 끝이 났다.

그 무렵 난 개명했다. 그전까지 내 이름은 석순기였다. 당시 같이 그림을 배우던 성명학 선생 한 분이 넓을 창(敞)자와 집 우(宇)자를 추천해줬다. 넓은 세상에서 활동하라는 의미라고 했다. 이 또한 하나님이 계획하신 프로그램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면 그의 신묘하심은 기가 막힌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