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에게 진정한 평등·차별 해소의 답 구하라

입력 2020-07-23 00:10
서울 좋은나무교회 청소년이 지난해 7월 교회에서 열린 주말캠프 토론대회에서 ‘블랑케트의 탈출은 옳았는가’를 주제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다. 좋은나무교회 청소년은 매주 금토일 교회에서 숙식하면서 영성·인성·독서훈련인 주말캠프에 참석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산다. 크리스천은 주인이신 예수님과 한 몸이 돼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교회가 마치 잠재적 범죄집단처럼 비치고 있다. 많은 목회자가 정부의 행정지침에 모욕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일부 교회는 방역 기준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다고 당국의 조사까지 받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크리스천이 자신의 주인인 그리스도를 잘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이 처치 이노베이션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은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서도 세상을 두려워한다. 예수님 대신 세상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단지 세상 성공을 이뤄주시는 분, 뭔가를 주시는 분으로만 여긴다. 예수님은 우리의 뜻대로 삶을 이뤄주시는 분이 아니다. 예수님의 뜻을 우리 삶에 이루시는 분이다.

예수님은 본질상 창조주,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온 세상이 그분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그분의 통치를 받는다. 이렇게 대단한 분을 모시고 사는 크리스천이 창조주를 과소평가하니 예수님 안에 참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이 말씀은 주인이 누구인지 가장 분명하게 해주시는 말씀이다. 우리는 진정한 주인이 누구신지 분명히 알고 온 세상의 통치차인 그분 안에 있을 때 참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행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세상이 교회를, 예수님을 파파라치 따라붙듯 따라가는 기막힌 현실이 벌어지고 있다.

영적으로 혼란스러운 현재 상황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명한 사실이 있다. 교회가 혁신하지 않으면 세상이 세속적 프레임으로 교회를 덮어씌운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그리스도의 옷을 입히지 못하니 세상이 교회를 무력화하기 위해 프레임으로 씌우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소그룹 금지 행정명령이다.

크리스천 4~5명이 식당이나 카페에서 식사하고 모임을 가지면 문제가 된다. 신고자는 포상금을 받을 수도 있다. 다른 테이블에서 커피와 식사를 하는 사람과 똑같은 국민인데, 왜 크리스천만 잠재적 범죄자처럼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할까. 전체를 위한다는 미명하에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무시한다. 전체주의적 사고와 다름없다.

포괄적 차별금지법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양심과 사상, 신앙의 자유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표현할 자유가 있다. 그런데 유독 기독교 신앙만 법으로 제재하고 이행강제금을 물리고 징벌적 손해배상을 부과하려 한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난 이후, 인류 역사에선 빈부 등 평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더불어 간과하지 말아야 할 중요한 원칙이 자유다.

자유가 없는 평등은 불행하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전 인민이 평등하다고 호언장담하는 북한만 봐도 자유 없는 평등이 얼마나 불평등한 상황을 만들어 내는지 알 수 있다. 사회주의적으로 차별을 없앤다며 자유 없는 평등을 추구하다 보면 하향평준화만 가져올 뿐이다.

이처럼 자유와 평등은 결코 분리해서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개인의 자유에 심대한 제약이 생기고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처럼 분쟁과 시비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법안 자체가 정파적인 데다가 추상적이고 포괄적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평등, 차별 해소의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주님은 온 천하 모든 사람에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베풀어주시는 분이다. 악인과 선인에게 평등하게 구세주로 오시는 분이다. 하지만 인간의 평등, 차별 해소는 그렇지 않다. 평등과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자유를 위협하고 자유민주주의의 헌법적 가치를 뒤흔들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

한국교회는 지금 집중할 일이 있다. 지역 연합회의 모든 목회자가 서울 여의도 국회를 방문해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대의민주주의를 지향한다. 항의 전화와 청와대 청원, 국회 방문이 정치인과 공무원을 향한 항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의사 표현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세상에 표현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종교의 자유가 침해당할 위기 앞에 믿음의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과 한 몸이 돼 복음이 흘러가는 통로가 돼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는 작은 교회들을 돌아봐야 한다. 출석 교인 200명 이상의 대형교회는 생존의 위기에 놓은 작은 교회를 섬기는 데 앞장서야 한다. 형제가 생과 사를 오가는 위기 상황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으로 교회에 세상 프레임을 뒤집어씌우려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가 아니다.

이강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