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위해 뛰어라, 아니면 알지?… 철인3종 여왕의 그림자

입력 2020-07-22 00:19 수정 2020-07-22 07:52
[최숙현이 떠난 자리]
① 짧고도 슬픈 스물두 해
② “우리는 모두 최숙현이었다”
③·끝 ‘장윤정 왕국’ 쏟아진 증언

최숙현 죽음의 가해자로 지목된 경주시청의 장윤정(가운데)이 2018년 5월 6일 중국 청두에서 열린 2018 국제트라이애슬론연맹(ITU) 트라이애슬론 월드컵에서 육상 구간을 달리고 있다. 복수의 경주시청 전직 선수들은 해당 대회에서 장윤정이 “다른 한국 선수들을 방해하라”고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국제트라이애슬론연맹 홈페이지

고(故) 최숙현(22) 선수 사건 가해자로 지목된 장윤정은 10년 동안 국내 트라이애슬론 일인자로 군림하며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비결은 실력만이 아니었다. 경주시청(팀)의 전현직 선수들은 성적 ‘몰아주기’와 팀원 ‘바꿔치기’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몰아주기’, 장윤정 천하의 비결

경주시청에 몸 담았던 선수들은 팀이 장윤정을 위해 존재했다고 입을 모았다. 선수 A씨(21)·B씨(23)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권이 달려 있던 중국 청두 국제트라이애슬론연맹(ITU) 월드컵에서 장윤정으로부터 마크맨 역할을 지시받았다. 견제 대상은 다른 ‘한국’ 선수들이었다. “장윤정이 ‘너는 ○○를, 너는 △△를 막아라. 몸싸움으로 막으면 내가 앞서 나가겠다’고 했어요.”

태극마크를 두고 경쟁하는 대회에서 경주시청 선수들은 장윤정의 수족 역할을 강요 받았다. 중학교 때 운동을 시작한 A씨는 “실제 마크맨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지만 명령 탓에 경기에 집중하지 못했다”며 “경주시청 전까진 누구를 마크하라는 지시를 받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장윤정은 이 대회에서 전체 13위(한국 선수 1위)를 기록해 아시안게임 출전권을 획득했다.

이 대회뿐만이 아니었다. B씨는 “2017년 통영 국제대회에서도 ‘너희는 막기만 하라’고 했다”고 전했다. 경주시청 선수들은 훈련 때조차 장윤정을 제쳐서는 안 됐다. “연습 때 장윤정을 앞서 나가면 ‘너 조만간 나 따라잡겠다’면서 왕따시켰어요.”

강압적인 분위기에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려웠다. 감독에게 왜 항의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A씨는 “경주시청에서요?”라고 반문했다. 장윤정에게 미움 받지 않으려면 부당한 지시도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경주시청은 장윤정에게 언제 찍힐지 몰라 떨던 곳”이라고 했다. B씨 역시 “김규봉 감독도 장윤정 편인데 그랬다간 뒷감당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장윤정의 경북체고 후배이자 한 실업팀 코치인 C씨는 “장윤정의 이력을 봤다면 알겠지만 한국에서 경쟁할 만한 선수는 한두 명밖에 안된다”며 “다른 선수들은 몰아주기라 할 수 있겠지만 그들도 장윤정과 뛰어 전국체전 단체전 메달을 땄기에 희생했다고만 볼 순 없다”고 반박했다. 이어 “2017년 전국체전에선 장윤정이 뒤로 처진 최숙현 선수 페이스에 맞춰 기록을 끌어올려준 걸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6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 정회 때 밖으로 나가는 장윤정(앞). 연합뉴스

‘바꿔치기’, 장윤정의 두 얼굴

경주시청 전현직 선수들은 또 장윤정이 팀원들을 이간질시켜 쫓아내면 자신의 보조 역할을 할 선수들로 다시 채웠다고 주장했다. 기량이 좋은 다른 팀 선수를 물색한 뒤 경주시청 입단을 회유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입단한 선수들은 매년 1월 전지훈련을 기점으로 장윤정의 괴롭힘에 시달려야 했다.

어린 선수들은 중·고교 시절부터 회유됐다. 운동을 지도해주거나 운동화·비타민을 챙겨주는 장윤정에게 호감을 품었다. B씨 어머니는 “팀에 들어가기 전엔 장윤정이 엄청 잘해줬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최숙현 아버지 최영희씨도 “중학교 땐 장윤정이 숙현이를 예뻐했다”며 “B가 팀에서 나가려고 할 때 대타로 숙현이를 포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매년 1월 뉴질랜드 전지훈련에서 장윤정은 돌변했다. ‘오냐오냐하면 애 망친다’는 이유로 신입 선수들에겐 이유 없는 폭언이 날아들었다. 선수들은 “장윤정이 선수들을 이간질해 서로 의지할 수 없도록 하고 자신의 명령만 따르게 했다”고 말했다. A씨는 “이간질 탓에 최숙현과도 가까워질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어린 선수들의 눈물과 고통 위에 쌓은 장윤정의 성과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팀 선수들이 장윤정을 동경하도록 만들었다. 선수들은 장윤정의 경주시청을 ‘드림팀’으로 생각했다. 2017년 말 경주시청에 합류한 A씨는 “팀 성적도, 지자체 지원도 좋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어릴 때부터 경주시청에 입단하고 싶었다”고 했다.

경주시청의 명성은 장윤정 왕국의 실상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윤정은 경주시청 팀원들은 물론 다른 팀 선수들까지 입단속을 시켰다. “다른 팀 선수들을 만난 자리에서 ‘얘 우리 팀 왕따야’라고 소개하고 ‘너희 절대 B한테 아는 체 하지 마’라고 했어요.“(B씨 어머니)

재계약 기간이 다가오면 장윤정은 돌변했다. B씨 어머니는 “위약금 때문에 2년 계약을 겨우 참았는데, 장윤정의 꼬임에 3년 차까지 갔다”며 “재계약 후엔 ‘군기가 빠졌다’는 식으로 B를 다시 왕따시켰다”고 전했다.

지난해 말 최숙현의 팀 탈퇴 후 장윤정이 대체자를 구하려 했던 정황도 있다. 올해 경주시청에 합류한 D씨(21)가 그 대상. 최영희씨는 “D가 지난해 장윤정을 뛰어넘는 기량을 보이자 포섭 대상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합류 직후 ‘길들이기’가 시작됐다. D씨 아버지는 “선수들 이간질은 물론이고 스폰서 용품 후원 받는다고 괴롭혀 김규봉에게 항의했다”고 말했다.

장윤정이 2010년 아시안게임에서 첫 메달을 기록한 이후 10년 동안 ‘트라이애슬론의 여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어린 선수들의 고통과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경주시청에서 겪은 육체·정신적 폭력으로 죄 없는 아이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어요.”(D씨 어머니)

장윤정·김규봉과는 관련 내용 확인을 위해 수 차례 통화를 시도하고 경북 경산의 경주시청 숙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최숙현이 떠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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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경산=정우진 이동환 기자 uz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