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한 행사장에서 “반도체를 만들 때 쓰는 에너지를 100% 재생에너지로 바꾸라는 요구가 생기고 있다”며 “이 문제는 제품을 싸게 만드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라 쉽지 않은 일이지만 시장의 요구가 생기고 있는 만큼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SK하이닉스는 애플과 아이폰 부품을 만들 때 100% 재생에너지 전기만 사용한다는 의미의 ‘협력업체 청정에너지 프로그램(Supplier Clean Energy Program)’ 협약을 맺었다. 최 회장이 꽤 오래전부터 애플의 요구를 고민했고 ‘통 큰 결단’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는 애플·화웨이 등에 모바일용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는 협력사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새 세계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부품 수요가 크게 줄었고, 지난해 미·중 무역전쟁까지 발생하면서 시장 상황은 더욱 어려워졌다.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SK하이닉스가 애플과 손잡은 타이밍은 절묘했다. 3~4개월 이후 애플은 아이폰12(가칭)를 공개하고 연말을 기점으로 제품 공급량을 대폭 늘릴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번 신제품은 아이폰 중 처음으로 5세대 이동통신(5G)을 지원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관심도 상당하다. 이에 따라 미국 3M을 비롯해 중국 오필름, 일본 소니반도체솔루션, 대만 ASE테크놀로지 등 세계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올해 애플과 재생에너지 사용 협약을 새로 맺기도 했다.
이처럼 SK하이닉스의 친환경 동맹 이면에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애플을 등에 업고 퀀텀 점프를 노려보겠다는 속내가 있다. 삼성전자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도 깔려 있다. 세계 D램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점유율 40%로 1위다. SK하이닉스가 점유율 30% 정도로 바짝 뒤쫓고 있다. 낸드플래시 시장에서도 삼성전자가 점유율 30% 이상으로 1위를 지키고 있지만, SK하이닉스는 수년째 적자를 이어오며 5위권을 맴돌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해 아이폰11 시리즈에 삼성전자가 공급한 모바일용 D램 비중은 40~50%로 알려졌지만 SK하이닉스는 30~40% 수준에 머문 것으로 전해졌다. 그런데도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전체 매출에서 애플 관련 매출 비중은 약 13%로 삼성전자(6%)의 두 배를 뛰어넘었다. SK하이닉스의 반도체 사업 측면에서 애플과 친환경 동맹은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삼성전자의 셈법은 복잡해졌다. 애플과 삼성전자는 2010년 아이폰3GS와 갤럭시S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 관계를 이어왔다. 세계 스마트폰 시장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시장점유율 1, 2위를 다투고 있다. 2011년부터 7년간 휴대전화 디자인 특허분쟁을 이어오기도 했다. 다만 부품 분야에서만큼은 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SK하이닉스가 애플과의 관계를 대폭 강화하면서 삼성전자도 애플의 ‘재생에너지 사용’ 요구를 수용할지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공생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할 것으로 보인다. IT 전문가는 “아이폰12 공개를 앞두고 SK하이닉스가 ‘친환경 동맹’이라는 초강수를 둔 것으로 풀이된다”며 “향후 삼성전자가 어떻게 대응할지 관심이 쏠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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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최재필 기자 jp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