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팔을 잃은 내가 세상에 처음으로 예술작품을 낸 것도, 대회에서 수상한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하나님께서 함께하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팔이 없어도 할 만한 것이 있다는 사실이 무척 고무적이었다.
성경에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 9:2~3)는 구절이 있다. 내가 장애를 얻은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려는 뜻이란 말씀을 지금 와서 깊이 실감한다.
1년 반 정도 전주에 있다가 애들 교육문제도 있고 해서 서울로 올라왔다. 여태명 교수로부터 소개받은 다른 한 선생님께도 배웠지만, 이내 다시 전주에 계시는 여 교수께 배우기로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전주로 갔다. 처음에는 아내와 같이 갔지만, 아내가 이제는 자신이 경제 활동을 해야 하니 혼자 내려가 보라고 했다. 아내가 날 기차역까지 데려다주고 전주역에 도착하면 처형이나 동서가 마중 나와 날 서예학원까지 데려다 줬다. 그동안 연습한 것을 여 교수께 보여주며 확인받곤 했는데 당시 연습한 화선지 양이 너무 많아서 두세 시간이 돼서야 연습한 것을 다 볼 수 있었다. 당시 서예학원을 하셨던 여 교수는 내가 갈 때마다 연습한 것을 모두 꼼꼼하게 보면서 가르쳐 줬다.
나중에 한 학원생을 통해 알고 보니 다른 학원생들도 여 교수께 체본(제자가 따라 쓸 수 있도록 스승이 써준 글씨)을 받아야 하는데 내가 계속 같이 있으니 언제 끝나려나 싶어 수차례 원장실을 들락거렸다고 한다. 다음에는 연습한 것을 조금만 가져갔다. 처형과 동서는 내가 머무는 동안 많은 걸 도와주며 배려해줬다. 일정이 끝나면 직접 전주역까지 데려다주며 서울로 올라올 수 있도록 해줬다.
하루는 여 교수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1년 과정의 ‘예술이론’ 강의가 있다며 공부해 볼 것을 권했다. 경기도 과천에 있는 미술관까지 가려면 집에서 지하철을 타고 가야 했다. 아내는 지하철 정액권을 비닐 주머니와 함께 내 가방에 넣어줬다. 그러면 난 개찰구에서 역사 직원의 도움을 받아 표를 꺼낸 뒤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었다. 한번은 표를 꺼내 달라고 직원에게 부탁했더니 “양손도 없으면서 어떻게 혼자 다니냐”며 “앞으로 다른 사람과 같이 다니라”고 면박을 줬다. 구걸하는 사람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직원이 안 보일 땐 지나가는 이에게 표를 꺼내 개표해 달라고 부탁도 해봤지만, 들은 척도 않고 지나간 이들이 많아 한참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지하철을 탄 기억도 있다. 그때부터 도움을 줄 만한 이들만 골라 부탁을 할 만큼 사람 보는 눈이 생겼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