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맛은 탄수화물의 맛이다. 탄수화물은 우리 몸의 에너지원이다. 단맛을 내는 당은 이 탄수화물이 잘게 쪼개져 있는 상태이다. 쌀 밀 옥수수 감자 고구마 등의 탄수화물 음식을 먹으면 몸 안에서 탄수화물을 당으로 분해해 에너지원으로 쓴다. 당은 분해돼 있는 탄수화물이니 곧장 에너지원으로 쓴다. 전분은 완효성 에너지, 당은 속효성 에너지라고 표현할 수 있다.
당을 입에 넣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사랑할 때에 분비되는 그 세로토닌이다. 행복해진다. 속효성 에너지가 들어왔으니 피로감도 사라진다. 당은, 설탕은, 단맛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뇌는 이 행복감을 유지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도파민이 터진다. 도파민을 흔히 쾌락의 물질이라 했는데, 요즘 과학계의 시각은 다르다. 갈구의 물질이라 한다. 도파민 자체가 쾌락을 주는 것이 아니라 쾌락을 주는 그 어떤 것을 지속적으로 몸에 들이거나 자극받게끔 유도하는 물질이다. 인간의 모든 중독은 이 도파민에 의한 것이다. 알코올 마약 담배 게임 등에 길들여지면 끊기 힘든 것은 도파민이 그렇게 시켜서이다. 설탕도 그렇다.
당에 중독을 일으키게 인체를 프로그래밍한 것은 신의 실수일까? 아니다. 인간이 문명화하면서 나타난 일종의 버그이다. 당을 대량으로 생산해 값싸게 공급하지 않았으면 우리 몸은 가끔씩 세로토닌을 터뜨리며 행복해했을 것이다.
인간의 뇌와 감각기관은 문명화 이전에 이미 세팅돼 있었다. 문명 이전,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당은 귀했다. 과일에 묻어 있는 당 정도로는 세로토닌 분비가 활성화되기 어렵다. 당 덩어리여야 한다. 자연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당 덩어리는 꿀이다. 원시의 우리 조상들이 숲속에서 어쩌다가 벌집 하나를 발견하면 ‘세로토닌 파티’가 벌어졌다.
사탕수수와 사탕무로 설탕을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했을 때에 인간은 스스로 크게 놀랐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까지만 하더라도 설탕은 귀했고 왕족과 귀족의 만찬에서 피날레를 장식하는 데에 썼다. 디저트의 유래이다. 만찬의 끝에 환각의 놀이가 있어야 하고 그래서 미리 세로토닌을 터뜨려줄 필요가 있었다.
산업화는 설탕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를 열었다. 식민지에서 노예를 잡아다 사탕수수를 재배하게 하고 설탕을 뽑았다. 산당화라는, 옥수수로 물엿을 만드는 초간단 기술을 개발했다. 가공식품에 값싼 물엿이 들어가게 됐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아니 당이 넘치는, 사랑의 물질인 세로토닌이 넘치는, 이상세계를 실현한 것일까? 불행하게도 인간은 이 과다한 ‘행복’을 감당할 수 있는 몸을 지니고 있지 않다. 산업화 이후에 인간의 뇌와 감각기관이 변한 것은 없다. 젖과 꿀이 흐르는 ‘설탕의 천국’에 적응하면서 살기에는 인간의 몸은 너무 낡았다. 인간의 몸이 바뀔 수 있을까? 유전자 가위로 당에 반응하는 유전자 하나를 싹뚝? 사랑도 잃게 될 것이다.
설탕은 사랑과 똑같다. ‘밀당’을 해야 하는 물질이다. 이상적으로는, 세로토닌만 분비시켜야 한다. 중독을 일으키는 도파민은 막아야 한다. 사랑이나 설탕이나 중독을 일으키면 집착이라는 병을 가져온다. 집착이 심하면 설탕을 입에 물고도, 사랑을 옆에 두고도, 불안해한다. 집착으로는 결코 행복을 얻을 수 없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뚱뚱한 사람들의 뇌 사진을 촬영했더니 단맛에 반응하는 수용체의 활성도가 낮아져 있었다고 한다. 단맛이 좋다고 온갖 음식에 단맛을 붙여서 먹게 되면 나중에는 단맛의 음식을 더더더 많이 먹게 돼 있다. 대한비만학회에 따르면 최근 10년간 비만 유병률이 청년층(20~39세)에서 크게 증가했다. 20대는 2009년 19.6%에서 2018년 28.5%로, 30대는 같은 기간 32.2%에서 40.5%로 급증했다. ‘당 권하는 사회’와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 아래로 피와 눈물이 함께 흐르게 마련이다.
황교익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