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오르다 보면 정상에 다다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오직 눈 아래 땅만을 굽어보며 한참을 걷다가 고개 들어 올려다보면 눈앞에 정상이 보인다. 그러나 생각처럼 정상에는 쉽게 다다를 수 없다. 산에서는 거리가 잘 측정되지 않는다. 보이는 거리와 실제 거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어느 만치 올라 한 굽이를 돌면 곧바로 정상일 것 같은데 힘들여 굽이를 돌아서 올려다보면 정상은 오른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굽이는 겹치마의 주름처럼 수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겹쳐 있어 산이 마치 숨바꼭질하듯 나를 골리는 것만 같다. 정상을 의식하고 산을 타면 곱절이나 몸이 무겁고 지쳐 힘들다. 더불어 산행의 즐거움도 사라진다. 한동안 나는 정상에의 강박 때문에 고행과 다름없는 산행을 해야 했다.
이제는 산을 오르면서 정상을 의식하지 않는다. 정상을 의식하지 않으니 조급증이 사라지고 오르는 과정이 즐거워진다. 천천히 보폭의 리듬을 지키면서 선율처럼 굽이치는 등고선을 밟아가다 보면 조금은 몸의 수고를 덜 수 있다. 오르다가 나무와 나무 사이로 보이는, 신의 가축인 양 하늘 목장을 느리게 산책하는 서너 마리 구름을 탁본해 마음의 방에 걸기도 하고, 산 아래 마을 부챗살처럼 펼쳐진 전경을 내려다보며 생활의 옷에 묻은 집착의 먼지를 털기도 하고, 비탈이나 벼랑 끝에서 최선을 다해 핀 꽃들에 눈을 맞추기도 한다. 또 적당히 사이를 두고 숲을 이루고 있는 수종들을 보면서 사이의 결핍, 간격의 부재 때문에 멀어진 인연들을 떠올리기도 한다.
투덜거리는 무릎을 어르고 달래며 산을 오르다보면 예고 없이 발부리에 채는 돌멩이처럼 지난 시절 나를 다녀간 생의 토막들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능선을 타듯 나는 헉헉, 숨차게 살아왔다. 생의 가파른 비탈을 오르면서 나는 얼마나 자주 발목을 낚아채는 좌절과 실의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던가.
산길을 자주 오르내려도 지루하거나 식상하지 않은 것은 걷는 행위에는 무슨 의도나 목적이 없고, 그저 다만 무위의 걸음만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산은 무엇을 깨닫기 위해 오르는 곳이 아니다. 생각을 비우고 아무런 감정도 의미도 갖지 않기 위해, 그저 일개 사물이 되는 상태를 위해, 아니 그러자는 의도도 없이 무념과 무상, 정신의 진공상태에 이르기 위해 오르는 곳이다. 그럼에도 마음의 침실에는 부지불식간 잡념의 티끌이 쌓인다. 산을 다녀오면 버릇처럼 나른한 피로가 스미고 밴 몸을 침대에 쓰러뜨린다. 달콤한 수면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다 나오면, 이상하다, 햇살 다녀간 뒤의 바싹 마른 빨래처럼 몸과 정신이 개운하다.
산 속 수목들은 저마다 우뚝 서서 자기의 주장들을 하고 있다. 수목들은 하나의 몸으로 살 수 없어 따로 떨어져 자기의 말을 푸르게 퍼뜨리고 있다. 저마다의 주장은 저마다 옳아서 하나의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어떤 나무도 절대 존엄인 양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늘을 다투는 나무들의 투쟁은 아름답다. 그러나 각기 다른 자세와 형상의 나무들이 드리운 그늘은 땅에서 하나의 전체가 되어 출렁인다. 산에서 나는 모든 소리는 기실 나의 내부 깊숙이에서 돌출해 바깥으로 현현하는 마음의 소리다. 그러니까 나는 내 소리에 귀를 모으며 걷는 중이다.
우리의 삶도 정상을 고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상을 의식하는 삶은 경쟁하는 삶이고 승리를 쟁취하는 삶이다. 싸워서 이겨야 하니 주변을 돌아볼 새가 없고 뒤돌아 살아온 길을 반추할 여유가 없다. 목표 달성의 삶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한다. 사는 과정 자체에 목적을 두지 않는 삶은 사는 즐거움을 모른다. 열심히 사는 삶이 미덕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자.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떠올려 본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