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용 목사의 ‘복음 설교’] 탕자의 비유(3)- 아버지

입력 2020-07-22 00:09

탕자의 비유에서 불편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왜 아버지가 미리 큰아들에게 잔치가 있음을 알려주지 않았을까’하는 점이다. 만약 둘째아들이 돌아온 사실을 미리 말해 주었다면 큰아들이 이렇게까지 서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가 미처 알리기도 전에, 큰아들이 그날따라 일찍 퇴근해 알게 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큰아들에 대한 배려가 없는 아버지라는 말을 피할 수는 없어 보인다.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둘째아들의 독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모든 돈을 탕진한 후에 돼지 치는 일을 하며 비로소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 세 가지 고백을 하기로 결심한다. 그것은 ‘내가 죄를 지었다’ ‘아들이라 일컫지 말라’ ‘나를 품꾼의 하나로 봐 달라’라는 것이다.(18~19절)

그리고는 아버지를 찾아간다. 이 아들이 얼마나 떨었겠는가. 그 자리에서 내침을 당할 수도 있을뿐더러, 패륜아라고 소문이 났기에 동네 어귀에서 이웃들에게 맞아 죽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동네에 들어서자 그를 발견한 아버지가 갑자기 몸을 던져 달려온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들의 마음은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을 환영하는 것인지, 죽이러 오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려오는 아버지가 가까이 올수록 아버지의 표정이 보인다. 눈물이 보인다. 그리고는 한껏 다가와 그를 확 껴안고 입을 맞춘다. 아버지의 행동이 아들의 마음을 녹인다. 그때 마음을 놓은 둘째아들은 준비된 대사를 한다.

둘째가 준비한 대사는 세 가지였다. 그런데 그중에 하나가 빠졌다. 세 번째 대사인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가 빠졌다.(21절) 이게 왜 빠졌을까. 그것은 바로 이어지는 22절을 읽으면 알 수 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버지가 아들의 말을 가로챈다. 아들이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하자,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이 더 이상 비참한 모습으로 그 앞에 서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 스스로가 품꾼으로 격하되지 않도록, 그 스스로가 모멸감을 느끼지 않도록 그에게 말할 기회조차도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그가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아들임을 상기시킨다. 그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운다. 그리고 발에 신을 신기며 “너는 종이 아니야. 나는 너를 결코 종으로 여길 수 없어” 하며 만방에 큰 소리로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다”라고 알렸다. 이것이 바로 큰아들이 돌아오기 전에 잔치가 열리게 된 동기다.

이 모습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주 앞에 돌아올 때 더럽고 추한 나의 모습에 고개조차 들 수 없고, 품꾼의 하나로 봐 주어도 족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하나님은 달려 나와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피로 옷을 입혀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아들이라 선포하신다. 그리고는 누구도 우리를 해할 수 없는 신분으로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집안의 첫째도 자기 의로 인하여 바른 복을 누리지 못했고, 집 나간 둘째도 율법의 족쇄로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 의와 율법으로는 결코 삶을 채울 수 없다. 우리의 행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통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만족하게 한다. 오늘도 그 아버지의 사랑이 기다리고 있다. 그 아버지의 초청에 응할 때 우리는 자녀의 복을 누릴 수 있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수용 미국 버지니아 한몸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