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서 돌아갈 집이 없다면 방랑이고 유랑이다. 반복적 일상과 소소한 다툼이 끊이지 않더라도 편안하게 머물 수 있는 집이 있다면 최고다. 익숙한 가족들과 공간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있기에 비로소 모든 여행은 의미를 갖는다.
이단과 잘못된 만남으로 고통스러운 ‘미혹의 여행’을 경험한 이단 피해자들이 있다. 누군가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목적지에 도달해 어찌할 바를 모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또 감언이설에 속아 모든 것을 빼앗긴 채 좌절 속에서 낯선 여행길에 머물러 있기도 하다. 그리고 누군가는 ‘집’으로 돌아올 용기와 면목이 없어 힘든 하루하루를 견디고 있다.
우리는 코로나19로 불안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이단에 빠졌다 돌아오는 피해자들을 위한 ‘집’을 준비해야 한다. 돌아온 그들이 편하게 머물 수 있도록 ‘집’을 디자인해야 한다. 이단과 동행했던 나쁜 여행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그래도 집으로 돌아와 참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 지난날 이단 문제로 온 가족이 힘들고 괴로웠지만, 아픔을 ‘지난 과거’로 흘려보낼 힘 역시 가족의 사랑에서 나온다.
이단에 빠졌었다는 한 번의 실수로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외로움과 자격지심으로 세월을 낭비하지 않도록, 교회와 가족의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마치 이단과의 투쟁을 통해 교회의 신앙과 신학이 공고해진 것처럼, 이단 피해자들은 더 굳건한 믿음과 소망을 갖게 될 것이다.
문제는 교회이다. 가족은 돌아온 부모 형제 자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만, 교회는 이기적 무사안일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단 바이러스 감염을 두려워한 나머지, 피해자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교회 문을 걸어 잠가서는 안 된다. 오히려 기존 성도들을 위한 이단 예방 백신 개발에 힘쓰는 동시에, 이단 피해자들이 정착하도록 ‘치유와 회복’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이단 피해자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지 않으면 이단 피해는 멈추지 않는다. 이들에 대한 지원은 한국교회의 거룩한 의무이다.
일제강점기 한국교회는 씻기 힘든 신사참배의 죄를 지었다. 1930년대 이후 찬송조차 부를 힘이 없었던 절망의 시기에 유일하게 만들어진 찬송이 있었다. 찬송가 527장 ‘어서 돌아오오’이다. 1943년 캄캄한 어둠 속에서 만들어진 이 찬송에는 하나님의 ‘집’을 떠나 신사참배의 죄를 짓고 헤매는 한국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이 절절히 드러나 있다. 마치 이단에 빠진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1절) 이단에 빠졌던 이들을 정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피해자들은 하나님께서 애타게 찾으시는 ‘잃어버린 양들’이다. 하나님께서 용서하고 안아주시는데 우리가 외면할 수는 없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 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 열어 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 자식 돌아오기만 밤새 기다리신다오.”(2절) 하나님께서 밤새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문을 열어놓고 초조하게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는데, 우리만 안전하자고 교회 문을 닫을 수는 없다.
“어서 돌아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 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3절) 이단으로부터 돌아오는 이들을 우리가 비난할 자격은 없다. 혼내는 분도 하나님이시요 상처를 위로할 분도 하나님이시다. 정의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