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짧고도 슬픈 스물두 해
② “우리는 모두 최숙현이었다”
③ 장윤정 왕국의 작동방식
체육계 폭력 사건은 연례행사처럼 반복된다. 폭력 행위가 폭로된 후 비난 여론이 들끓고, 뒤늦은 수사와 처벌, 대책 마련이란 패턴이 이어진다. 언론의 대응도 매번 같다. 폭로 내용과 수사 상황을 보도하고, 체육계의 관행과 솜방망이 처벌이 문제라는 분석을 내놓는다.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선수 고(故) 최숙현(22)의 죽음도 지금까지 같은 방식으로 다뤄지고 있다.
하지만 최숙현을 단순히 ‘가혹행위 탓에 극단적 선택을 한 선수’로만 기억하는 건 비극이 돼버린 그의 삶만큼이나 비극적이다.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 아름다운 청년이 어떤 꿈을 꾸었으며, 그가 사실상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동안 왜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없었는지 살펴야만 체육계 폭력의 본질적인 해결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국민일보는 최숙현의 삶을 재구성한 일대기를 쓰기로 했다.
하지만 최숙현을 단순히 ‘가혹행위 탓에 극단적 선택을 한 선수’로만 기억하는 건 비극이 돼버린 그의 삶만큼이나 비극적이다.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 노력한 아름다운 청년이 어떤 꿈을 꾸었으며, 그가 사실상 ‘사회적 타살’을 당하는 동안 왜 우리가 그를 도울 수 없었는지 살펴야만 체육계 폭력의 본질적인 해결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국민일보는 최숙현의 삶을 재구성한 일대기를 쓰기로 했다.
행복하고 꿈 많던 학교 수영 선수 시절
낙동강 줄기의 작은 개천이 흐르는 경북 칠곡의 한 마을에서 최숙현은 여느 아이들처럼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 때 방과후 교실에서 시작한 수영은 최숙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최숙현은 코치가 자리를 비우면 쉬는 아이들과 달리 꾀 부리는 일 없이 연습에 몰두했다. 매일 부족한 부분을 복기하기 위해 훈련일지를 작성하는 습관을 들인 것도 이때였다.
“피곤할 텐데도 대회 전날 자진해서 훈련을 더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어요. 경북 대회를 휩쓸었던 3, 4학년 때부터 숙현이의 꿈은 국가대표였죠.” 초등학교 시절 내내 최숙현의 코치였던 임모씨는 ‘선수’ 최숙현이 남달랐다고 했다.
이때가 가장 행복하게 물살을 가르던 시기였다. 최숙현은 어머니, 사촌동생 이모씨와 함께 매일 칠곡에 하나뿐인 수영장을 오갔다. 이씨는 “수영이 끝나면 언니랑 매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이모가 싸온 과일을 차에서 함께 먹었던 추억이 소중하다”고 떠올렸다. 대회를 오가며 친해졌던 경북체고 후배 임모씨는 “언니는 항상 잘 웃었다. 그때 언니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최숙현을 기억하는 이들 모두가 잊지 못하는 순간은 접영 200m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2010년 82회 동아전국수영대회다. “처음엔 1등을 뒤에서 따라갔지. 근데 반환점을 터치하자마자 치고 나가더니 결국엔 따라잡더라고. 숙현이랑 껴안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몰라.”
칠곡 자택에서 만난 아버지 최영희씨는 10년 전 장면을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떨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소주병을 냉장고에서 꺼내 들고 한 모금 들이킨 최씨의 눈가는 벌겋게 젖어 있었다.
철인3종과 함께 찾아온 꿈과 좌절
철인3종이 전국소년체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2011년. 경북은 경북체중 2학년 김모씨가 개인전 2위를 차지해 가능성을 봤지만 단체전 입상에 실패했다. 이에 지도자들은 경북 각지에서 선수를 물색했다. 레이더에 걸린 건 수영에 육상 능력까지 겸비한 칠곡의 최숙현과 구미의 채모씨였다.
채씨의 코치였던 곽모씨는 최숙현의 코치 임씨에게 경북 팀 참여를 제안한다. 수영선수 최숙현은 전국대회 7, 8위를 맴돌아 예선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철인3종으로는 가능성이 보였다. 아버지 최씨와 임 코치는 ‘숙현이를 올림픽에 내보내자’는 일념으로 자전거를 못 타던 최숙현에게 자전거를 가르쳤다. 최숙현은 “한번 도전해보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금세 적응해 나갔다.
2012년 소년체전을 석 달 앞둔 2월 최숙현은 경북체중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된다. 당시 경북에 철인3종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코치는 체중의 이모씨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최숙현은 김씨, 채씨와 함께 경산에서 합숙하며 트랙과 수영장을 모두 갖춘 체중에서 훈련한다. “위탁 갔을 때는 억수로 재밌어 했죠.” “3종목을 하는 게 힘들었지만 표정은 밝았어요.” 코치들의 회고에 따르면 최숙현은 일취월장했고, 경북에 전국소년체전 단체전 금메달을 안겼다. 시작한 지 1년도 안 된 사이클로 경북 1위 김씨를 능가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왜관에 플래카드 걸리고 잔치를 벌일 정도였으니까.”(임 코치) 최숙현은 칠곡의 자랑이 됐다. 교육청부터 교장까지 나서서 최숙현의 장비값으로 예산 500만원을 지급했을 정도였다.
선수로선 ‘철인’이었지만 인간 최숙현은 14세 사춘기 소녀이기도 했다. 소년체전이 끝나고 칠곡으로 돌아온 최숙현은 다시 홀로 운동을 해야 했다. “항상 혼자였으니까… 친해지고 난 뒤 ‘먼저 말 걸어줘서 고맙다’고 하더라고요.”(전 남친 추모씨) 학교엔 갔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하교한 뒤 함께 어울려 떡볶이를 사먹는 흔한 일상도 사치스러운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훈련을 해야 했고 끝나면 밤 11시였다.
그나마 육상 선수들과의 만남이 최숙현에겐 숨 쉴 틈이었다. 선수들은 가끔씩 훈련 일정이 맞을 때 왜관 남부정류장 근처에서 만나 밥을 먹고 노래방에 갔다. 그리고 서로의 고민도 털어놓았다.
“숙현이는 거의 안 부르고 들었어요. 그래도 되게 밝고 말도 많이 했죠.”(친구 김모씨) 최숙현과 추씨가 사귀게 된 것도 그 무렵. 하지만 만남은 두 달 만에 끝났다. “코치분들이 처음 보는 저를 석전중 근처 카페로 불러 1시간 동안 욕을 하며 그만 만나라고 했어요. 자연스레 멀어졌죠.”(추씨) “여자 선수는 연애하면 영향이 크다고 연애를 못 하게 했죠.”(체고 후배 임씨)
최숙현은 ‘칠곡의 자랑’이어야 했다. 외로운 훈련은 계속됐고, 결국 탈이 났다. “담임 선생님이 애가 이상하다고 병원에 가보라 했어요. 공황장애라 했죠. 기대가 부담이 됐나봐요(최영희).” 최숙현은 다른 선수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는 경북체중으로 전학가길 원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교육청에서 전학을 안 시켜주려 했어요. 이적동의서 받는 데만 반년은 걸렸죠(최영희).” “지자체가 메달 딴 선수를 좋게 안 보내려 해요(이 코치).”
체중에 간 최숙현은 경북 팀 주장을 맡은 2013년 전국소년체전에선 채씨, 새로 합류한 임씨와 함께 개인전 금메달, 단체전 은메달을 이끈다. “큰언니처럼 의지가 됐어요(임씨).” 다만 살이 잘 찌는 체질이었던 최숙현은 체중 관리로 힘들어했다. 그래도 노력 끝에 2013~14년 청소년 국가대표에 뽑혔다. “처음 태극 마크를 달고 정말 좋아했어요. ‘철인3종 계속 할거야’란 말을 했죠(채씨).”
체고 2학년이 된 최숙현의 앞을 막은 건 경주시청의 ‘그들’이었다. 철인3종은 선수 풀이 적었기 때문에 고등부가 없었고, 고교생들은 전국체전에서 일반부에 나서야 했다. 선수들이 “중학교 때부터 X년 X발은 입에 달고 있던 분”이라고 기억하는 김규봉이 최숙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규봉의 가혹행위 정황을 목격한 이들은 한둘이 아니다. “숙현이가 매일 기숙사에 울면서 들어왔죠(최모씨).” “몸을 떨고 위축된 모습이라 말을 걸 수도 없었죠(추씨).” “경주시청 눈치를 보는 모습이었어요(편모씨).”
최숙현은 “할 수 있다” “버텨내면 더 좋은 길이 나올 거다”는 자기최면을 걸었다. 하지만 전지훈련에서 따돌림·폭력은 심해졌다. 역도 선수 최씨에 따르면 철인3종 외에 “카페를 차리고 싶다” “세계를 누비는 스포츠 기자가 되고 싶다”는 다른 꿈도 꿨던 최숙현은 전지훈련 이후 “죽고 싶다. 모두 관두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노래 듣고 영화 보는 게 취미였던 최숙현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가장 행복해야 했을 학창시절을 폭행 속에서 그저 ‘버텨냈다’.
경주시청에서 무너진 꿈
“2019년 화려하게 트라이 복귀해 보는거야! 할 수 있다 아즈아~.”
지난해 1월 20일, 최숙현은 다시 운동을 시작해보겠다고 다짐했다. 전지훈련 장소 뉴질랜드에 도착한 첫날이었다. 1년간 운동을 쉬면서 망가진 몸을 되돌리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고, 20㎏ 이상 감량했다. 최영희씨는 “아빠 걱정하지 마! 잘 견디고 있어!”란 메시지를 받았다.
하지만 최숙현의 다짐이 무너지는 데에는 두 달도 걸리지 않았다. 3월 11일 훈련일지엔 “진짜 그만하고 싶다. 눈물만 흐른다”고 적었다. ‘그들’의 폭력에 최숙현은 공포에 떨었다. “저 사람들이 무섭고 죽을 것 같다. 겁이 나서 온몸이 굳어버린다(7월 10일 일지).”
최숙현은 고3 때 이미 경주시청의 소유물이었다. 김규봉은 최영희씨에게 계약서도 보여주지 않은 채 “경주시청에 데려가겠다”고 했다. 내신이 좋아 이화여대에 지원하려 했던 최숙현의 대학 진학 문의를 위해 담임선생님을 찾은 어머니는 “경주시청에서 데려가니 원서 쓸 필요가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타의로 대입을 포기한 최숙현은 부모에게 “실업팀 갈게. 빨리 돈 벌어서 효도할게”라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하지만 친구에게 털어놓은 속마음은 달랐다. 채씨에게 “나는 언제 일반인처럼 살 수 있을까. 다음 생엔 나도 친구들이랑 노래방도 가고 학원도 다니면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토로했다.
2017년 경주시청 입단 후 구타와 폭언은 더 심해졌다. 최숙현은 한 친구에게 “매일 맞고 산다. 너무 괴롭다”고 토로했다. “선배 못지않게 잘하겠다”는 말 때문에 주장 장윤정에게 찍혀 본격적으로 따돌림을 당한 것도 이 시기다. 그리고 두 차례나 팀을 뛰쳐나오기도 했다.
이듬해 최숙현은 호프집 서빙,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경북의 한 어린이수영장에서 코치로 8개월가량 근무했다. 수영장 대표는 “결근 한번 없이 성실하게 일했지만 어딘가 어두워보였다”고 상기했다. 당시 사생활에 대해 침묵했던 최숙현은 “팀이 복귀를 원한다”며 11월 수영장을 퇴사했다.
실제로 경주시청은 2018년부터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최숙현 설득에 나섰다. 김 감독은 최영희씨에게 “올해는 부담 안주고 가볍게 운동 시키겠다”고 말했고 장윤정은 최숙현에게 친절을 베풀며 회유했다. 최숙현은 고민 끝에 재입단했지만 가혹행위는 여전했다. 친구 최씨는 “지난해 숙현이는 ‘그만두고 싶은데 계약 때문에 버텨야 한다’며 압박감을 토로했다”고, 추씨는 “감독·주장의 기분에 따라 팀 분위기가 달라진다고 괴로워했다”고 떠올렸다.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 했던 경주시청 계약기간이 끝난 지난해 겨울, 최숙현은 구미에서 어릴 때 수영을 함께 한 코치·친구들과 함께 밤늦도록 술자리를 가졌다. “다 컸으니 선생님이 소개팅을 주선해주겠다”는 말에 최숙현은 크게 웃기도 했다. “너무 밝아 어떤 고통을 겪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요. 그게 숙현이와 가진 처음이자 마지막 술자리였죠(곽 코치).”
최숙현은 올해 1월 부산시청으로 옮겼다. 그의 목표는 다시 철인3종에서 성공하는 것과 함께 경주시청 가해자들이 처벌받는 것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경찰 등을 찾아가 피해를 호소했지만 매번 무시받았다. 가해자들은 입을 모아 가해 행위 자체를 부인했다.
폭력의 잔상은 지워지지 않았고, 최숙현에겐 다시 공황장애가 찾아왔다. 괴로움을 잊으려 자해도 했다. 그렇게 지난달 26일, 최숙현은 짧은 생을 마감했다. 최숙현이 사망 전날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엔 생전 키우던 반려견이 뛰노는 영상과 함께 ‘누구보다 그립고 생각나던 그날’이란 메시지가 적혀 있다.
“생생해 그때 그 기억들이. 사람들은 잊어라 잊어라 그러지만 당사자는 잊히지 않아서 힘든 건데…(최숙현이 추씨에게 보낸 카톡 메시지 중).”
[최숙현이 떠난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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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경산·구미·대구=이동환 정우진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