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당 5년 만에 새 예배당 신축을 선포하다

입력 2020-07-21 00:03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앞줄 왼쪽 일곱 번째)가 2005년 10월 경기도 용인 프라미스 콤플렉스 성전 입당식에서 장로, 안수집사, 권사 임직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입당예배 모습.

경기도 성남 구미동에 새 예배당을 짓고 5년이 되던 해 용인 죽전의 새 예배당 신축을 선포했다. 예배당을 짓고 5년 만에 다시 예배당을 짓는다고 하는데 어느 누가 수긍하겠는가.

예배당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비전과 가치다. 자칫 교회 성장과 물량적인 목표만을 강조하다 보면 거부감이 생기고 성도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없다. 비전만 잘 제시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선제적 준비와 대응을 잘해야 한다.

교역자수련회에 가서 교역자들과 함께 각 교인의 의사가 어떤지 점검했다. 예배당 신축 적극 지지층, 일반 지지층, 중도 지지층, 일반 반대층, 적극 반대층으로 나눴다.

수련회를 다녀와서 적극 반대층으로 예상했던 분들을 찾아가 심방을 했다. 정말 자정까지 다녔다. 그분들에게 이렇게 격려하고 축복했다. “집사님이 우리 교회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정말 감사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게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존재감과 자존감을 심어주고 목이 터지도록 기도해줬다. 그분들이 감동했다. 그 후 일반 반대층을 심방 다녔다. 행여라도 그들이 시험에 들까 봐 예방 사역을 먼저 한 것이다. 그다음으로 일반 지지층과 적극 지지층은 전화나 문자로 충분히 소통했다.

그러면 중도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중도층은 어느 쪽이 대세냐에 따라서 움직인다. 반대층만 최소화하면 중도층은 목회자의 뜻에 공감하고 함께한다. 이렇게 ‘예방 사역’을 한 후, 설교시간에 비전을 선포했다. 그리고 광고시간에 어떻게 대지를 매입하고 예배당을 지을 것이며 재정을 어떤 방법으로 조달할 것인지에 대해 구체적인 마스터 플랜을 제시했다.

그리고 마지막 결단의 메시지를 던지며 성도들에게 호소했다. “하나님이 저에게 기도 가운데 성전 건축에 동참한 자에겐 강력한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그중 몇 사람들을 축복의 모델로 삼아주신다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두 축복의 선구자가 됩시다. 기적의 선도자가 됩시다.”

모든 성도가 바로 작정과 결단을 하게 했다. 그 결과 단 한 사람도 실족하지 않고 모두가 자원해 동참하며 큰 역사를 이룰 수 있었다. 그때 새 예배당 이름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다는 의미로, 약속의 종합단지를 뜻하는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로 정했다.

성도들은 강력한 비전과 가치에 감동해 자발적으로 헌신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많은 성도가 교회로 헌금을 가져와서 줄을 서서 기도를 받을 정도였다. 그 결과 두 달 반 만에 땅값을 다 지불해 버리고 건축을 시작했다.

당시 40대 초반의 목사가 연건평 1만 평의 교회를 짓는다고 했을 때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다. 교인 3000명 내외 규모로 1만평 예배당을 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교회가 부도나거나 소 목사가 건축 도중 쓰러져 죽을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그러나 성도들이 비전과 약속으로 똘똘 뭉치고 열정으로 결속되니까 그런 소문은 무색하게 됐다. 매일 밤 프라미스 콤플렉스 건축을 위한 릴레이 기도회를 하며 뜨겁게 기도했다. 성도들은 더 열정적으로 전도했다. 땅을 사서 건축하는 동안 갑절의 부흥을 했다. 단 한 명도 건축 도중에 이탈하지 않았다.

언젠가 미국 집회를 갔을 때 빌 게이츠가 설립한 마이크로소프트사를 방문한 적이 있다. 박물관에 가니 최초의 컴퓨터부터 삼성과 애플의 최신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소프트웨어 혁명의 역사를 전시해놨다.

그곳엔 우리 교회 예배당처럼 어마어마하게 큰 건물이 많았다. 그런데 사무실과 회의실마다 공통점이 있었다. 화이트보드나 흑판이 걸려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순간 좋은 아이디어나 비전이 떠오르면 적으라고 한 것이다.

거기에 글귀가 하나 쓰여 있었다. “우리가 이윤만을 추구할 때는 항상 갈등과 어려움과 난관에 봉착했다. 그러나 비전을 추구하고 나갈 때 회사는 계속 성장했다.”

안내자가 이런 설명을 해 줬다. “사랑이 서로를 마주 보는 것이라면 비전은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회사가 이익만을 좇았을 때는 난관에 부딪히기도 하고 직원끼리 갈등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비전을 추구하고 쫓아갈 때는 항상 형통하고 회사가 눈부시게 발전했다.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에도 그런 분위기였다. 성도들에게 가치와 비전을 제시하며 한마음으로 나아갔다.

목회자의 욕망과 기득권층의 사욕이 앞서면 예배당을 짓는 중에 의견충돌이 생기기 마련이다. 건축한 이후에도 교회 균열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특히 대형교회 건축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새에덴교회는 선명한 비전과 가치라는 기반 위에 지었기에 어떤 분열이나 낙오도 없이 든든히 세워갈 수 있었다. 새 예배당을 건축하고 입당예배까지 드린 후에 본격적으로 부흥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비전과 가치로 온 성도가 한마음을 품었다.

입당예배의 영광과 교회의 부흥은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 치밀한 전략과 준비가 말씀과 기도와 어우러졌기에 가능했다.

▒ 왜 ‘생명나무 목회’인가
다윗은 삶의 순간마다 생명나무 선택했다


누구나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선택해야 하는 두 갈래 길에 설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선악과를 선택하고 멸망하는 길로 간다. 어떤 사람은 생명나무를 선택해 역전의 축복과 기적의 길로 간다.

다윗은 생명나무를 잘 선택해 은혜를 받고 승리한 사람이다. 그는 어떻게 생명나무를 선택해 승리했고 하나님께 영광을 드렸는가.

첫째, 그는 의협심의 생명나무를 선택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베들레헴 양치기 노릇을 하면서 사자나 곰이 와서 양 새끼를 물어 가면 턱수염을 잡고 맹수의 입을 벌려서 양을 건져 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바로 이때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특별히 사도행전 13장 22절에 보면 바로 이때 하나님이 다윗을 향해 “내 마음에 합한 종”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목동 시절부터 다윗의 내면에 하나님이 기뻐하셨던 뭔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의협심이었다. 다윗이 목동 노릇을 할 때는 그의 의협심이 표면적으로는 아버지와 양들을 위해서만 나타났다.

그런데 골리앗과 싸움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의협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는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는 의협심의 불길로 골리앗 앞에 나가 싸워서 목을 베어버렸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제일 먼저 에브라임 지파가 버렸던 언약궤를 유다 지파 곧 다윗 장막으로 모셔왔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실 성전을 짓고자 했다. 다윗은 매 순간 무슨 일을 하든지 의협심을 갖고 희생하며 헌신했다.

둘째, 그는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논하는 생명나무를 선택했다. 다윗은 사자와 곰과 싸울 때도 하나님을 의지했고 골리앗과 싸울 때도 하나님만 의지했다.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닐 때도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논했다. 블레셋의 공격을 받아 잡혀간 그일라 백성들을 구하러 갈 때도 하나님과 의논했다.(삼상 23:4~5) 심지어 블레셋과 전쟁이 끝난 후 유다에 갈 때도 자기 생각과 열정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과 의논을 했다.(삼상 30:7~8)

셋째,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찬양하는 생명나무를 선택했다. 다윗은 10여년이 넘도록 사울에게 쫓겨 광야에서 끝없이 유리하고 방황하는 삶을 살았다. 기회가 되면 요새나 은신처에 숨었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이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에게 밀고했다. 특별히 그일라 사람들과 십 황무지에 거하는 사람들이 다윗을 배반하고 사울에게 정보를 줬다. 그때 다윗이 얼마나 배신감을 느끼며 가슴이 쓰리고 아팠겠는가. 이럴 때 선악과를 따면 원망과 불평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의 특공대에 둘러싸여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오히려 낙헌제를 드리며 감사했다.(시 54:6)

넷째, 하나님의 말씀 앞에 회개하는 생명나무를 선택했다. 다윗도 사람인지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찬양을 하다가 한순간에 넘어진 적이 있었다. 부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책망하실 때 나단 선지자를 하나님의 사자로 영접하며 바로 회개했다.(삼하 12:13)

다섯째, 더 하나님께 헌신하고 희생하는 생명나무를 선택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의협심 하나로 언약궤를 모셔오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 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모든 사재를 다 바쳤다. 왕실의 국고만 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님께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낌없이 다 바쳤다.(대상 29:2~3)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인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삶이 힘들고 고달프다고 해서 절망하고 낙망하고 있지 않은가.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 생명나무를 선택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의 테스트일 수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힘든 상황일지라도 생명나무가 풍성한 교회는 방역수칙을 지키면서도 예배를 사모할 뿐만 아니라 주님을 더 사모한다. 한국교회가 생명나무가 풍성한 교회가 됐으면 좋겠다.


소강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