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마음의 기술자

입력 2020-07-17 04:07

약 100년 전인 1925년 ‘위대한 개츠비’ 초판본이 출간되던 당일, 작가 피츠제럴드는 편집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금이야 이메일이나 문자가 오갔겠지만 당시에는 편지와 전보가 소통 수단이었다.

“책이 오늘 나옵니다. 두려움과 불길함으로 꼼짝도 못 하겠습니다. 책에 중요한 여성이 1명도 없다고 여성 독자들이 안 좋아하면, 혹은 순 부자들 이야기고 소작농은 1명도 없다고 평론가들이 안 좋아하면 어쩌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작가에게 며칠 후 편집자의 답장이 도착한다. “호평 기사가 눈에 잘 띄게 크게 실렸습니다. 저는 이 책을 너무 좋아하고 글 속에 숨겨진 함의를 많이 봐온 까닭에 책의 평가와 성공 여부가 지금 눈앞에 있는 어떤 일보다 중요합니다.”

편지의 내용은 지금 이 순간 한국의 출판사 편집자와 작가가 나누는 것과 엇비슷하다. 예나 지금이나 작가에게 편집자는 그런 존재다. 책을 만드는 일에는 이렇게 작가를 지지하고 확신을 심어주는, 책이 세상에 흘러나오도록 길을 트고 방향을 정하는 일이 포함된다. 독자는 책을 읽으며 작가를 느끼지만, 사실 그 행간과 배면에서 또 하나의 정신과 에피소드를 만나는 것이다.

작가 피츠제럴드와 편집자의 편지를 들춘 이유는 며칠 전 후배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는 시대예요. 이런 시대에 편집자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이,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다르게 하는 편집자’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인쇄 제본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혁명으로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적당한 비용만 지불하면 한두 시간 안에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전히 작가는 출판사에 원고를 넘기고 편집자는 그 원고를 교열하고 구성을 고민하며 디자인하고 책을 출간한다. 단지 인쇄 제본을 대리하는 것 외에 편집자가 맡는 고유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

편집자는 ‘무엇을, 왜, 어떻게 펴낼 것인가’를 고민하며 원고를 기획하고 저자를 섭외하고 교정교열과 디자인, 제작, 마케팅, 홍보의 공정을 관장한다. 각 과정의 담당자들과 협의하고 설득하며 일을 만들어간다. 그러니까 편집자란 전문적인 지식과 감각으로 사람의 마음을 다루는 기술자인 것이다. 편집자가 다르면 같은 저자, 같은 원고라도 다른 책이 출간된다. 편집자마다 원고 해석과 판단이 다르기 때문이다. 편집 실무는 숱한 경우의 수로 조합되는데, 최적의 조합을 고민하고 제안하고 또 설득하는 일, 거기서 편집은 결국 마음을 다루는 일이 된다.

후배 편집자는 나아갈 길을 위해 직업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지만 내 지인들은 도대체 편집자가 아직도 필요하냐고 묻는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정보가 너무 많아서 묻는 것이다. 정보가 부족하던 때에는 작가처럼 원고를 쓰는 것도 아니고 번역가처럼 언어를 옮기는 것도 아니고 디자이너처럼 책 꼴을 갖추는 것도 아니라면 편집자는 무얼 하는 존재인지 물었었다. 이제는 책 만들기가 이렇게 쉬운 시대에, 글과 디자인만 있으면 인쇄와 제본이 자동으로 이뤄지는 시대에 편집자가 꼭 필요하냐며 그 존재감을 묻는다.

나는 작가 피츠제럴드의 편집자 편지글을 소개하며 답한다. “선생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대로 따르고 싶지만, 짧은 글 하나하나를 모아 다듬어서 그저 한 묶음으로 합치는 대신 그 글들을 토대로 책 한 권을 펴내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기술이 진화할수록 책을 제작하는 일은 수월해질 것이다. 하지만 작가에게 미처 생각지 못한 제안으로 동기를 부여하고, 피츠제럴드의 경우처럼 가끔은 길이 기억될 책을 남기게 하는 건 한배를 탄 동반자의 애정 어린 마음일 것이다. 책은 출간 직전까지도 과정의 영향을 받는 변덕의 산물이다. 그사이 마음의 돛대를 붙들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편집자가 여전히 필요하고 더욱 중요한 이유는 작가를 움직이고 독자를 설득하는 마음의 기술자이기 때문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