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의 바벨탑 경계하고 겸손의 사다리 타고 내려오라

입력 2020-07-17 18:53
미국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지난해 10월 개최된 ‘시니어 축제’에서 참가자들이 학창시절 복장을 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교회는 매년 봄가을 시니어 축제를 열어 장년 전도와 순모임 활성화의 시간을 갖는다.

저는 외국어에 관심이 많아서 여러 언어로 읽고 말하곤 합니다. 대학생 때부터 영어 통역을 했습니다. 유학 때는 토플 시험도 보지 않고 전화 한 통으로 면접을 마치고 전액 장학금까지 받았으니,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미국인과 한인 2세들을 대상으로 영어권 목회를 했습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동시통역을 하면 그런대로 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영어를 극복했다는 성취감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통역할 때면 알아듣지 못하는 말 때문에 진땀을 흘리기도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말이 나올 때 적당히 넘어가면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대단히 곤혹스럽기도 합니다.

한국사회는 ‘영어병’에 시달리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영어로 대학이 결정되고, 대학 때는 영어로 직장이 결정됩니다. 직장에서도 영어로 승진이 결정돼 거의 영어에 인생이 좌우되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영어로 된 영화 하나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 대다수의 현실입니다.

현재 전 세계 언어 가운데 10% 정도의 언어로만 구약성경이 번역됐습니다. 신약성경을 하나의 언어로 번역하려면 약 10년이 걸리고, 구약성경까지 번역하려면 적어도 20년이 걸립니다.

하지만 본래 인류의 언어는 하나였습니다. 오늘날 수백 개의 언어가 존재하는 것, 외국어 공부로 긴 세월을 보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역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교만으로 쌓아 가는 바벨탑

창세기 10장은 사람의 이름으로 가득 채워진 계보 장입니다. 창세기 10장에는 셈과 함과 야벳의 후손들이 소개됩니다. 먼저 야벳 계열 14명, 함 계열 30명, 그리고 셈 계열 26명이 기록돼 있습니다.

노아의 후손이 모두 70명이라는 사실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70은 완전한 숫자로 하나님의 은혜로 후손이 잘 형성됐음을 상징합니다. 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이 노아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를 쓸어 버리셨지만, 노아를 통해 아담에게 주셨던 축복을 다시 주시고 수많은 자손을 번성하게 하심으로 약속을 이뤄 가셨습니다.

홍수 심판으로 멸망당한 조상의 경험을 생생하게 전해 들은 자손들이지만, 그들은 다시 하나님 앞에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단일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이들이 모여 바벨탑을 쌓기 시작합니다. 바벨탑은 하나님의 계획에 항거하는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만들어 그들의 계획을 순식간에 무산시키십니다. 바벨탑을 쌓는 것이 왜 하나님의 분노를 촉발했을까요.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두 가지 면에서 하나님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창 11:4) 첫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성읍과 탑을 건설해 하늘에 닿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명성을 높이고 하나님 없이도 위대한 문명을 이루고 살 것을 확신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가 교만입니다.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교만의 죄를 이렇게 말합니다. “본질적인 악, 최고의 악은 교만이다. 이에 비하면 부정, 탐욕, 술 취함,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악은 벼룩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바벨탑을 쌓는 목적은 그들이 흩어지지 않고 연합해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연합이란 아름다운 일인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은 생육하여 땅에 충만하게 번성해 가는 것입니다.(창 1:28, 9:1, 7)

뭉쳐 사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하나님 말씀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대로가 아니라 생각대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은 또 다른 범죄의 요인이 됐습니다. 신앙인에게 선한 것은 자신들의 윤리나 유익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신자가 행동할 수 있는 기준입니다.

현재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로 믿는 모든 한국교회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제정을 온몸으로 반대하는 이유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행복을 해칠 뿐입니다.

바벨탑에서 만나는 하나님

하나님은 직접 강림해 인간의 계획에 개입하셨습니다. 홍수 심판 이후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가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이 주인이 돼 버린 인류를 다시 멸절시키실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만드는 방법을 택하셨습니다.

바로 아침에도 서로 통용돼 함께 벽돌을 나르고 탑을 쌓았던 사람들의 언어가 더 이상 소통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흩어지길 거부하고 탑을 쌓았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결과는 흩어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인류의 흩어짐에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서도 땅에 번성하라는 말씀을 이뤄 가십니다.

오늘날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바벨탑이 있습니다. 신앙이 좋을수록 높아지기 쉬운 교만의 탑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바벨탑입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능력을 찬양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앉히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을 찬양합니다.

신앙인이란 삶의 자리가 높아질수록 겸손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는 사람입니다. 하늘의 모습을 버리고 이 땅에 종의 형체를 입고 오신 예수님은 낮아지지 않고는 만날 수 없는 분입니다.

(미국 와싱톤중앙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