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여름, 이런 강연이 열렸다. ‘무용계 #metoo, 침묵의 카르텔을 깨다.’ 들불 같았던 미투운동에도 무용계는 참 고요했구나 생각한 건 그때부터다.
3년 전 서지현 검사를 시작으로 파도처럼 번진 미투운동은 작년 이맘때도 사회 전반에 일렁이고 있었다. 비슷한 강연이 잇따라 열렸지만 이 게시물이 특별했던 이유는 그 주체가 무용계라서다. 연극, 문학 등 예술계에서 고발이 줄줄이 터져 나올 때도 무용계는 말이 없었다. 미투가 없다고 피해자도 없을 리 만무했다. 이 강연은 그 세계에 만연했던 성폭력을 공론화하는 신호탄인 셈이었다.
강연장에 모인 무용인들은 피해자의 입을 막는 건 폐쇄성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도제식 학습 탓에 스승에게 절대복종해야 했고 접촉 없이는 교육할 수 없으니 무용수의 신체 주권도 스승에게 있었다. 그들은 교습과 성추행의 모호한 경계를 악용했다. 폭행·협박은 없었고 항거 불가능한 상태도 아니니 ‘교육이었다’고 하면 그만이었다. 더욱이 어느 분야보다 좁고 깊어 인맥은 얽히고설켜 있다. 무용계의 침묵 그 자체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럼에도 첫 폭로는 기꺼이 등장했다. 그게 이 강연이 마련된 계기였다. 지난해 A씨는 자신이 미성년자였던 2015년 당시 피해를 고발했다. 하늘 같던 스승은 단둘이 있을 때마다 강제로 추행했고 급기야 성관계를 시도했다. 신고는 엄두도 못 냈다. 그의 눈 밖에 났다가는 무용수 인생은 끝이라는 건 자명했다. 가해자는 현대무용진흥회의 최고 무용가상을 받고 각종 콩쿠르 심사위원을 역임한 무용계 저명인사 류모씨였다.
당시 A씨가 동료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류씨의 귀에 들어갔다. 그의 위력이 A씨 주변을 맴돌았고 차츰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무용을 계속할 수 있을까. 몇 년을 숨어 살았지만 끝내 돌아갈 수 없었다. 꿈을 내려놓은 그에게 남은 건 불안장애였다.
역설적이게도 A씨가 무용을 포기했기 때문에 류씨를 고발할 수 있었고, 희망적인 건 그가 골방에 숨어 있는 동안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던진 돌멩이도 균열의 시발점이 됐고, 이후 탄생한 무용계 역사상 첫 성폭력 피해 연대 ‘무용인희망연대 오롯 #위드유’는 이 틈을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다시 여름. 최근 류씨 사건에 대한 2심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위력에 의한 성추행을 인정하고 징역 2년을 유지했다. 균열이 생긴 지 1년 만의 일이다. 미투에서 비롯된 사법적 치유는 약에 기대 잠들었던 꼬박 5년의 세월에 위로를 건넸다. 이 판결이 언젠가 용기 낼 누군가의 미래일 수 있다는 게 더 고마웠다. 그래서 우린 세상이 바뀐 줄 알았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미투는 대중의 서늘한 시선 아래 있다. 피해를 주장하는 이가 성폭력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위력을 가진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때문에 사법 절차를 시작도 못 하고 사건은 종결됐다. 검사 출신 변호사였던 고인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피해자는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고, 안전한 법정에서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다고 했다. 실체를 밝히려는 자의 지극히 상식적인 요구 아닌가.
그러나 고인은 진상 규명의 기회마저 내어 주지 않았다. 피해자는 아무런 사과도 받지 못했고, 고인은 어떤 책임도 지지 않았다. 그저 홀연히 사라지기를 택했다. 가해자의 부재는 피해자에게 가장 치명적이다. 피해자더러 왜 자책감마저 느끼라 하는가. 고인이 떠난 자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위력으로 채워졌고 생각보다 단단했다. 장례식은 성대했고 빈소 주변엔 ‘당신의 뜻을 기억하겠다’는 현수막이 나부꼈다. 그 틈으로 비집고 날아든 ‘네 탓에 죽었다’는 비난은 피해자의 온몸을 할퀴었다. 그럼에도 고인의 명복을 빌며 말했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난해 여름 시작돼 1년 만에 승리한 싸움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올해 여름 다시 모든 걸 내던진 투쟁이 시작됐다. 모든 미투는 결국 위력이 빚어낸 견고함에 어떤 방식으로든 균열을 낸다. 그리고 반드시 (설령 매우 작더라도) 유의미한 변화를 이끌 것이다. 그게 미투가 계속돼야 하는 이유다. 용기 낸 모두가 부디 지치지 않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