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 후 무엇보다 출근하며 딸에게 두 팔로 직접 과자를 사줄 수 없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다. 그래도 천성이 긍정적인 탓일까. 두 팔을 잃었을 뿐 걸을 수 있고, 말할 수 있으니 대형사고 치고는 양호하게 다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2만2900V 고압 전류에 감전되면 두 다리도 건사하지 못하곤 하는데 걸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감사했다. 동료나 부하직원보다 오히려 내가 다친 게 나았단 생각도 했다. 날 돌봐주던 아내도 워낙 병시중을 잘해준 탓에 내 상황이 잘 실감나지 않았다. 아내가 팔이 없어진 나를 보고 울지 않으니 나도 그런가보다 싶었다. 지금 얘기해보면 아내도 내가 전기 쪽 일을 하니 사고가 날 수 있겠단 염려를 늘 했다고 한다.
의식이 돌아온 뒤 회사 쪽 사람들이 찾아왔다. 당시만 해도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과 시스템이 열악했던 때라 제대로 보상을 받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 측에선 일정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지 않으면 소송으로 갈 수밖에 없다며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나왔다. 아내는 담당자의 그런 태도에 크게 화를 냈다. 주변 사람들은 회사와 싸워 보상금을 받아내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와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 잘못도 있겠거니 싶었고, 무엇보다 괜히 돈 때문에 추하고 구차해지고 싶지 않았다. 힘든 병원 치료를 해가며 지루한 소송전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회사엔 돈이 우선이 아니란 뜻을 전했다. 인간적인 대우와 진심이면 된다고 했다. 일정액의 보상금을 받는 선에서 회사와 합의를 봤다. 이후 1년 반 동안 병원 신세를 지며 힘겨운 치료의 시간이 이어졌다.
사고 소식이 알려지자 성당 다니는 어머니 친구들이 종종 병문안을 왔다. 하루는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자 신부님을 모셔와 대세(代洗)를 해주셨다. 퇴원 후 천주교 교리를 공부하며 개신교의 세례와 같은 영세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교회를 다니며 기독교 신앙을 갖긴 했지만, 신앙심이 그리 크지 않았던 난 당시만 해도 천주교나 개신교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따금 병원 선교를 위해 인근 교회 사람들도 와서 전도지를 나눠주며 기도를 해줬다. 당시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도 전도를 왔는데 집사님이 나를 위해 기도해주면 희한하게도 통증이 좀 덜했다. 그때 하나님의 존재와 다른 사람이 해주는 기도의 효과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됐다.
하지만 난 병원을 퇴원한 후에도 한동안 성당에 나갔다. 그때만 해도 하나님께 날 위한 계획과 예비하심이 있으리라곤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인제 와서 되돌아보면 하나님께선 자신만의 때를 따라 묵묵히 준비하고 계셨다. 다친 것조차도 하나님의 프로그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현실에 순응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갖도록 해주신 게 아닐까 싶다.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