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기구(WTO)의 수장을 뽑는 선거가 막이 올랐다. 지난 5월 호베르투 아제베두 사무총장이 임기를 1년 앞두고 갑작스럽게 사임한 데 따른 선거다. 이미 아제베두 총장의 사퇴 이전부터 WTO는 미국과 중국 등 초강대국 간 갈등 격화와 세계적으로 보호무역주의 기조 확산 속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보여주지 못해 ‘식물기구’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8명의 후보가 ‘WTO의 구원투수’를 자처하며 지난 8일까지 입후보를 마쳤다.
‘3수’ 끝 첫 한국인 총장 나올까
한국인의 WTO 사무총장 도전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유 본부장에 앞서 김철수 전 상공자원부 장관이 1995년 2대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떨어졌고, 2013년에는 박태호 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 6대 사무총장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마셨다.
통상 당국 안에서는 “이번만은 다르다”는 기류가 강하다. 그동안 한국이 내놓은 후보와 달리 유 본부장은 여성 후보다. 1995년 WTO 출범 이후 역대 사무총장 6명이 모두 남성이었다. 그 가운데 3번이 유럽 대륙 출신이었다. 최근 ‘코로나19 모범 방역국’으로 한국의 국제사회 위상이 높아진 점도 고무적이다.
유 본부장은 1995년부터 25년간 통상 분야에서만 일해왔다. WTO 창설 첫해인 1995년 겨울부터 통상산업부 세계무역기구과에서 일한 인연이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통상 전문가는 17일 “우리나라 역대 통상교섭본부장보다 유 본부장이 네트워크와 WTO 체제에 대한 이해도가 탁월하다”고 치켜세웠다.
‘아프리카 대세론’ 등 만만찮은 판세
그러나 선거 판세는 한국에 녹록지만은 않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중견국으로서 선진국과 개도국 간 무역갈등을 풀어갈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왔지만, 이번 선거를 앞두고는 ‘아프리카 총장 배출론’과 ‘선진국 재등판론’의 목소리가 도드라지는 양상이다.
WTO 164개 회원국 중 3분의 1가량(54개국)을 차지하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번에는 아프리카 출신 WTO 사무총장을 배출해야 한다”는 기류가 강하다. 8명의 후보 중 나이지리아의 응고지 오콘조 이웨알라 후보와 케냐의 아미나 모하메드 후보, 이집트의 압델-하미드 맘두 후보 3명이 아프리카 출신이다. 특히 자국 재무장관과 세계은행 전무를 거친 이웨알라 후보가 유력 주자로 꼽힌다. 다만 3명이 모두 나와 표가 분산될 수도 있다. 또 코로나19 정국 속에서 에티오피아 출신 테드로스 아드하놈 게브레예수스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이 친중 행보를 보인다며 WHO 탈퇴를 선언한 미국이 아프리카 후보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많다.
선진국 사이에서는 선진국이 다시 WTO의 키를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국제통상부 장관을 지냈던 영국의 리엄 폭스 후보가 대표 사례다. 신흥국에 속하는 브라질 출신 전 아제베두 총장이 선진국과 개도국 간 갈등에서 이렇다 할 리더십을 못 보여줬다는 논리다. 영국 출신으로 WTO 사무총장 입후보를 검토했던 필 호건 유럽연합(EU) 무역 담당 집행위원은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이번에는) 선진국이 (WTO)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지난달 밝혔다.
다만 이와 관련해 통상 당국 고위 관계자는 “미국은 최근 WTO와 가장 심하게 대립해온 국가로 아마 WTO 선거와 관련해 자기 패를 쉽게 드러내지 않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EU 내에서도 EU를 탈퇴한 영국 대신 다른 국가 후보를 밀자는 기류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비상시국에 출신 대륙 따질 때 아냐”
정부는 이러한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비상시국론(論)’을 밀고 있다. 통상 당국 고위 관계자는 “평상시 같으면 출신 대륙과 젠더, 선진국·후진국이 고려 요소가 되겠지만, 지금은 침몰하는 배에서 선장이 도망가고 후임 선장을 뽑는 선거”라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일단 총장이 되고서 WTO의 문제점이 뭔지 들여다보겠다’고 할 만한 여유가 없으므로 현직 장관인 유 본부장이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이 선출되면 프랑스 출신 파스칼 라미 전 총장에 이어 두 번째 현직 장관 출신 WTO 수장이 된다.
유 본부장은 도전 일성으로 “시의적절하고(relevant) 회복력 있으며(resilient) 대응력을 갖춘(responsive) WTO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유 본부장이 언급한 ‘3R’은 현재 WTO가 처한 상황과 무관치 않다는 게 통상 당국 설명이다. WTO가 무역 분쟁에 있어 시의적절함도 갖추지 못했고, 강대국의 규정 위반에도 이렇다 할 대응을 못 하고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WTO는 전임 총장의 갑작스러운 사퇴로 인한 선거임을 고려해 통상 3개월인 선거운동 기간도 2개월로 단축했다. WTO 선거는 164개 회원국에 어떤 후보를 선호하는지 물어본 뒤 지지도가 낮은 후보를 차례차례 탈락시킨 뒤 최종적으로 단일 후보를 만장일치로 선출하는 과정으로 뽑는다. 최종 결과는 10월 중순 전후에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