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의구 칼럼] 박원순의 길, 비서의 편지

입력 2020-07-15 04:01

성 피해자의 고통 진솔하게 담은 박 전 시장 비서의 글
죽음 때문에 용서할 기회마저 박탈당한 안타까움 나타나
죽음으로 다 안고 가려 해도 책임 남는다는 사실 일깨워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고소한 전직 비서의 글이 13일 공개됐다. 기자회견장에서 대독된 서신에는 그가 겪어야 했던 길고 깊은 고통은 물론 극단적 선택을 한 박 시장에 대한 심경도 담겨 있다. 글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내용이 분명했다. 그는 고민의 수렁에 빠져 오랫동안 외로운 길을 걸었을 터이다. 특히 자신에 의해 고소당한 고위 공직자가 뜻밖의 선택을 함으로써 창졸간에 더 큰 혼란의 한가운데로 내몰렸을 것인데 상황 인식이 투명하고 표현 역시 담백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로 편지는 시작됐다. 사건 초기에 단호하게 문제를 제기하지 못한 데 대해 “미련했다” “후회스럽다”고 썼다. 고소를 결심한 배경을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안전한 법정에서 그분을 향해 이러지 말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습니다” “힘들다고 울부짖고 싶었습니다”라고도 적었다. 솔직한 표현법은 여성들은 말할 것도 없고 딸 가진 부모, 누이를 둔 형제들의 심장에도 와서 꽂힐 듯싶다.

박 시장의 죽음 앞에 그는 아직도 믿고 싶지 않다는 심경과 함께 명복을 빈다고 밝혔다. “죽음, 두 글자는 제가 그토록 괴로웠던 시간에도 입에 담지 못한 단어입니다. 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할 자신이 없었습니다”라며 “그래서 너무나 실망스럽습니다”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했다. 스스로에게도 죽음의 그림자가 닥쳤지만 차마 그 길을 선택할 수 없었다는 절절한 고백이기도 하다.

편지에 따르면 그가 바랐던 바는 죽음이 아니라 사과와 용서였다. 그는 “용서하고 싶었습니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법의 심판을 받고 인간적인 사과를 받고 싶었습니다”라고 썼다. 법정에서 진상이 밝혀지고 사법 처리가 이뤄진 다음, 남아 있는 긴 세월의 흐름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용서하고 용서받는 길을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박 시장이 걸어간 길은 달랐다. 이번 사태를 보는 눈, 죽음을 앞둔 태도도 달랐던 듯하다. 고인은 집무실 책상에 남긴 유서에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 내 삶에서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고 썼다. 자신이 홀연히 세상을 떠남으로써 큰 슬픔과 충격을 받을 가족 앞에는 “오직 고통밖에 주지 못한 가족에게 내내 미안하다”는 글을 남겼다. 죽음에 대해 쉽사리 얘기하고 함부로 재단하는 건 예가 아니며 가당치도 않다. 하지만 유서에는 이번 사태에 대한 어떤 변명도 없었을 뿐 아니라 피해자가 바랐던 사과도 없었다. 모든 분에게 죄송하다는 게 전부였다. 사과를 하면 모든 책임을 인정하는 게 되므로 굳이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수 있다. 혹은 밀물처럼 밀려드는 죄책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박 시장이 걸었던 길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던졌지만 처음은 아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 2018년 노회찬 전 정의당 원내대표가 걸어간 길이기도 하다. 두 고인 모두 수사 대상이 된 후 사회적 비판에 대한 부담감과 지지자들을 향한 책임감을 눌러쓴 유서를 남겼다. 두 선택을 놓고 도덕성과 책임감 때문에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움 섞인 관측이 나왔다. 반면 사회 지도적 인사로서 선택하지 말았어야 할 길이라는 아쉬움도 제기됐다.

박 시장의 길도 표면상으로는 같지만 다른 부분이 있다. 자연인 피해자가 있고, 따라서 그에 대한 배려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박 시장도 책임감 등등으로 법적 처벌과 전혀 등가가 성립되지 않는 의외의 선택을 했지만 정치적 문제 외에 인간적 책임이 존재한다. 모든 책임을 죽음으로 안고 가려 했겠지만 피해자에게는 사과받고 용서할 기회가 차단된 것과 같기 때문이다. 피해자에게는 죽음이 또 하나의 가해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세월이 지나 역사책 한 자리에 박 전 시장은 시민운동에 남긴 큰 족적, 3선 서울시장 등으로 기록될 것이다. 죽음에 대해선 성추행 의혹이 제기되자 극단의 선택을 했다고 쓰일 것이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떠넘겨진 심적 압박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채 피해자 마음에 깊은 상처로 남을 것이다. 죽음으로 책임지려 하지만 온전히 사라지지 않는 책임이 있음을 비서의 편지는 알려준다. 꾸미지 않은 글이 우리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