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운성 목사의 하루 묵상] 침묵으로 말씀하시다

입력 2020-07-15 00:14

언변이 뛰어난 사람이 주목받는 시대입니다. 하지만 때때로 침묵이 웅변보다 나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말을 통해서도 전달되지 않는 가슴 속 사연이 침묵을 통해 더 잘 전달될 때가 있죠. 그래서 옛 어른들은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는 경구를 통해 침묵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예수님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침묵의 설교자셨습니다. 그분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시고 가야바 대제사장의 집에서 열린 산헤드린 공회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결과는 사형. 그런 뒤 빌라도 총독에게 끌려갔습니다.

빌라도 총독 앞에 선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몸부림치면서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던 죄수만 보던 빌라도 총독은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보며 놀랐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한마디도 안 하셨던 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정체성과 관련한 질문에는 분명하게 답하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예수님께서는 그렇다고 하셨습니다. 이때도 침묵하셨다면 왕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명백하게 답하신 겁니다. 그 외의 질문에는 일절 말씀하시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의 침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바로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아. 난 너희를 사랑한다. 내 아버지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메시아로 보내신 이유는 사랑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갖고 너희에게 왔다. 너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내 가슴에 사무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가슴에 사무치는 사랑을 말이 아닌 몸짓으로 설교하신 것입니다. 말보다 더 강한 몸짓으로 설교하고자 하셨기에 입으로는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위대한 사랑의 설교를 선포했던 강단은 다름 아닌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는 올라서는 강단이 아니라 매달리는 강단입니다. 십자가는 청중이 화답하고 박수하는 영광의 강단이 아니라, 삿대질 당하고 욕먹는 강단입니다. 그곳은 혈색 좋은 설교자가 멋진 가운을 입고 올라서는 강단이 아니라, 벌거벗겨진 채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로 적시고 매달리는 강단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서 침묵의 몸짓으로 선포된 설교야말로 지금까지 선포된 모든 설교 중 가장 위대한 사랑의 설교였습니다. 예수님의 상처는 사랑의 말씀이었고, 핏방울은 사랑의 속삭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침묵의 설교는 2000년이 지난 지금,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우리 귓전에 들려오고 있습니다.

행동 없이 입으로만 하는 고백은 대부분 거짓입니다. 몸으로 하는 고백이 뒤따를 때 비로소 진정한 고백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설교는 진짜 설교요, 가장 능력 있는 설교였습니다. 십자가 설교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설교입니다. 그 설교를 제대로 들은 사람은 고꾸라졌고 인생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말을 합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작은 이슈에도 댓글이 너무 많이 달립니다. 그 대부분은 정제되지 않은 채 감정을 쏟아내는 화풀이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거짓인 경우도 있죠.

대한민국이 너무 시끄럽고 혼란합니다. 이젠 침묵으로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20절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말하기보다 기도하면서 묵묵히 그리스도인답게 행동으로 말하며 살아갑시다. 이런 삶의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 글도 또 하나의 말이 될까 두렵습니다.

(영락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