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만 유행하는 것도 아니지만, 요즈음은 별 걸 다 줄여서 쓴다. 이 문장도 줄여서 ‘별다줄’이라고 하는데, 가령 이런 것이다. 엄근진(엄격 근엄 진지), 할많하않(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등등. 언어란 사회적 약속인 동시에 장구한 흐름이자 그 자체로 역사인바, 잠깐 동안 빠르게 쓰이고 소멸하는 말도 많다. 또 어떤 말은 유행하던 쓰임 그대로 단단하게 굳어, 표준어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임계장’이란 말의 앞날은 어떨까?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 주 소개된 ‘임계장 이야기’는 버스 회사의 임시직과 아파트, 빌딩, 터미널 같은 시설의 경비원으로 일한 작가의 노동 일지다. ‘일지’답게 시종일관 담담한 문체로 서술되지만, 거기에 부려진 현실은 담담하지 못하다. 정규직으로 줄곧 일하다 비정규직으로 일하게 된 저자는 “‘일터’가 아닌 ‘노역장’에 가까운 노동 강도와 차별에 시달린다. 정해진 일과 정해지지 않은 일 모두를 처리해야 하며, 화장실 옆에 식사 장소가 있고, 하루 온종일 CCTV에 감시를 받으며, 그러다 갖가지 이유로 쉽게 해고당한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은 위와 같은 취급을, 글로 쓰지 못한 더한 취급을 받는 존재다.
앞서 말한 다소 우스꽝스러운 신조어들, 엄근진, 할많하않, 꾸안꾸는 수많은 유행어가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운명이다. 그러나 임계장은 그러지 않을 것만 같은 예감이 답답증을 일으킨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만들어 낸 사회 시스템을 탓할 수도 있다. 갑질을 일삼는 소수의 이웃에게 손가락질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내 무신경한 다수가 되어 아파트의 품에 안겨 휴식을 취한다. ‘감시 단속적’ 근로자인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30분 단위의 일과표가 휴식에 도움을 줄 것이었다. 그런 태도가 ‘임계장’을 표준어로 등극시키는 동력이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의 동력.
한국의 60대 근로자가 쓴 일지에서 일본의 20대 홈리스 여성에게로 시선을 옮겨 본다. 하타노 도모미 장편소설 ‘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사소하게 잘못된 판단을 거듭하다 절망의 끄트머리까지 내몰린 여성의 이야기다. ‘임계장 이야기’가 서울 고층 아파트, 안 보이는 구석에 숨겨진 이야기였듯이 ‘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도쿄 화려한 도심의 골목 안쪽에 웅크린 이야기이다. ‘임계장 이야기’가 일터에서 혹사당하는 노인의 이야기라면 ‘신을 기다리고 있어’는 일터를 찾지 못해 내몰린 청년의 이야기다.
26세 여성 ‘미즈코시 아이’는 문구업체에서 3년 동안 ‘인턴’으로 일한다. 인턴 계약 후 정규직 전환을 구두로 약속받은 적 있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먹고 입을 것을 줄이고 성실하게 저축해 왔지만 일할 곳이 없어지자 당장의 살고 있는 집의 월세부터 문제가 된다. 부모와는 절연했고, 달리 의지할 데도 없는 아이는 여행용 트렁크에 간단한 짐을 쑤셔 넣고 거리로 나선다. 길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홈리스 생활은 기한 없이 늘어나고, 일일 아르바이트보다 쉬워 보이는 돈벌이의 유혹도 계속된다. 그동안은 상상조차 못했던, 도시 하층민 여성과 관계를 맺으며 아슬아슬한 삶을 이어간다. 그런 삶을 삶이라 할 수 있을까? 다시 자기 자신의 삶을 꿈꿀 수 있는 것일까? 팽팽한 장력의 줄 위에서 가까스로 유지하던 균형이 깨져 버린 아이. 어쩌면 아이가 줄에서 넘어진 게 아니라, 줄 자체가 끊어져 버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즉석만남 카페’ 등 도쿄 뒷골목과, 거기에 삶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성, 은폐된 구조에 올라타 폭력에 중독된 남성… 그곳 여성이 기다린 ‘신’은 하루 잠자리를 제공하는 남성이라고 한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신을 기다리는 여성들은 그러나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어렴풋하게 확인한다. 다음 날이면 다시 즉석만남 카페로 나와야 하는 현실이 그들을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운이 좋은 편이었을까. 그토록 기다리던 신은 거짓 친절을 베풀던 카페의 손님이 아닌, 오랜 친구 ‘아마미야’였다. 그리고 ‘나기’였다. 신은 손을 내밀어 주는 자이자, 내 손을 잡아주는 사람인 것이다. 그 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진 않을 테다. 그러나 하나씩 문제를 찾아 다시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손잡아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이 아닌 손이 필요하다. 구체적 도움을 주는 손, 제도를 정비하고 적용하는 손, 고통에 연대하는 손이 필요하다. 26세 빈곤층 청년에게도, 63세 비정규직 경비원에게도.
서효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