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주는 24년 전 뮤지컬 ‘브로드웨이 42번가’의 한국 초연 당시 앙상블 배우 오디션을 봤다. 하지만 준비했던 탭댄스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채 노래 한 곡만 부르고 탈락했다. 당시 오디션에 온 다른 참가자들은 실력은 물론 화려한 외모와 늘씬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요즘 표현으로 ‘센 언니’ 스타일인 정영주는 잠시 실망했지만 “언젠가 꼭 저 무대에 서고 싶다”고 생각했다. 바람은 현실이 됐다. 지금 그는 극중 최고의 스타 도로시 브록 역으로 ‘브로드웨이 42번가’에 출연중이다. 그는 8일 “난 여주인공에 정형화된 배우는 아니지만 시대가 변했다”며 “여배우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터닝포인트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정영주는 1994년 뮤지컬 ‘나는 스타가 될 거야’로 데뷔한 올해 27년 차 배우다. ‘서편제’ ‘명성황후’ ‘팬텀’ 등 수많은 뮤지컬에 출연했고, 2016년 tvN ‘시그널’을 시작으로 드라마에도 뛰어들었다. 특히 지난해 SBS ‘열혈사제’에서 정동자 역을 맡아 입지를 다졌다.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시대 시골 출신 앙상블 배우 페기 소여가 여주인공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그린 쇼뮤지컬로 1980년 미국에서 초연됐다. 한국에서는 1996년 초연 이후 2년에 1번 꼴로 공연될 정도로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정영주는 극중에서 최고 스타였다가 명성을 잃은 브록 역을 맡았다. 브록은 그의 돈많은 애인이 작품에 투자한 덕분에 캐스팅된다.
정영주는 올해 도로시 역을 처음 제안받고 “시대가 많이 달라졌다”고 실감했다. 신인 때 외모가 가냘프지 않다는 이유로 굴욕을 맛봤기 때문이다. “스태프처럼 생겼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그는 상처받지 않았다. 무대에서 중요한 건 진심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무대에서 예쁜 건 30초면 끝나요. 하지만 진심을 담으면 3시간을 버틸 수 있죠.” 그래서인지 정영주를 롤모델로 삼는 후배들이 많다. 그는 “뿌듯하면서도 사명감이 생긴다”며 “무대와 방송이 배우의 모습을 규정하지 않도록 달리겠다”고 말했다.
정영주 역시 남다른 후배 사랑으로 유명하다. 후배들에게서 자신의 지난날이 보여서가 아닐까. 그가 앙상블의 성장을 담은 이 작품에 특별한 애착을 가진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는 “앙상블로 데뷔해서 그런지 유독 후배들이 눈에 밟힌다”며 “누구나 페기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앙상블이 대우받길 바란다”며 “해외에서는 30년 동안 앙상블만 하는 전문 배우도 있다. 인식 개선과 처우 보장이 이뤄진다면 한국에서도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극 후반부 다리를 다친 도로시 대신 무대에 오르는 페기에게 조언을 해주는 장면에서 감정이 유독 북받치는 건 그가 바로 페기이자 도로시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관객이 네게 서서히 끌려오도록 만들어. 그래야 당당한 페기 소여가 돼” “삶은 무대 위에서 새로워져. 널 위한 시간이 왔어. 즐겨”. 이 대사는 정영주가 신인 시절 듣고 싶었던 말이면서 지금의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