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BTS)이 선택한 곳은 서울대가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이었다. 코로나 여파로 오프라인 졸업식에 가지 못하는 전 세계 졸업생을 위로하려고 유튜브가 마련한 온라인 가상 졸업식. 이름 하여 ‘디어 클래스 오브 2020’ 연설 장소 말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부부,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 최연소 노벨평화상 수상자 말랄라 유사프자이, 팝스타 비욘세, 로버트 게이츠 전 미국 국방장관, 콘돌리사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 이들 글로벌 정계, 재계, 문화계 거물들과 함께 연사로 초청된 7인의 멤버들은 그곳에서 졸업생들을 격려했다.
RM은 ‘두려움’, 뷔는 ‘즐거움’의 힘, 정국은 ‘믿음’, 진은 ‘성실’, 슈가는 ‘가능성’, 지민은 ‘위로’, 제이홉은 ‘딱 한번만 더의 정신’을 이야기했다. 이런 메시지를 전하는 장소는 한국의 어디여야 할까. 신중하게 여러 곳을 물색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는 최종 이곳을 낙점했다고 한다. 10일 현재 전 세계 850만명 이상이 조회한 유튜브 속 그 장소 말이다. 그들은 국립중앙박물관의 ‘역사의 길’에서 축사를 했고, ‘열린 마당’에서 ‘작은 것들을 위한 시’를 부르며 대미를 장식했다. 그렇게 BTS를 통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전 세계에 소개됐다.
사실상 한국 첫 국제현상 공모
가상 졸업식 공연을 보며 지구촌 ‘아미(팬)’들은 이곳이 어딘지 궁금해 하지 않았을까. 서울 용산구 서빙고로 중앙박물관은 2005년 완공돼 화려하게 용산시대를 열었다. 신축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첫 해인 1993년 확정됐다.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복원을 위해 박물관으로 쓰이던 옛 중앙청(일제강점기의 조선총독부 )을 95년 8월 15일에 맞춰 철거함에 따라 새 건물이 필요했다. 완공까지 10년이 걸리는 사이 국립중앙박물관은 경복궁 내 현 국립고궁박물관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세계화를 기치로 내건 YS시대 아닌가. 90년대 최고의 문화프로젝트였던 이 건축물에 대해 YS정부는 1995년 국제설계 공모를 했다. 한국 최초로 UN산하 국제건축가연맹(UIA) 주관 하에 국제건축설계경기 방식으로 설계안을 공모한 것이다. 46개국 341작품이 출품될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 글로벌 경쟁을 뚫고 한국의 정림건축이 당선됐다. 그 때 심사위원 7명 가운데 4명이 외국인이었다.
당시 정림건축에서 디자인 대표를 맡아 설계를 이끌었던 건축가 박승홍 디엠피건축 공동대표(66)는 “심사위원들이 ‘한국, 참 용감하다(brave)’는 말을 했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한국 유일의 중앙박물관 건물 아니냐, 만약 외국인에게 그것도 일본 사람에게 돌아갔으면 어쩔 뻔했냐는 뉘앙스였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멀리 남산과 앞의 거울못…배산임수
BTS가 춤추던 열린마당의 계단은 남산을 배경으로 한 일종의 무대 장치다. 환한 낮에는 건물 자체가 액자가 돼 멀리 남산을 산수화처럼 끌어들이는 곳이다. 계단 너머로 네모 형태로 뻥 뚫린 시야에 남산 풍경이 잡히는 것은 중요하다. 남산은 설계 구상에서 핵심적인 요소다. 한국은 산의 나라다. 산은 한국적 정서와 지식, 믿음과 가치의 원천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 산을 배경으로 성곽처럼 펼쳐져 있는 건축물이다. 동관과 서관을 합쳐 가로 길이가 무려 404m나 된다. 또 높이 43m, 지하 1층 지상 6층 짜리 건축물의 벽면을 지붕 높이까지 한껏 뻗치게 함으로써 성벽이 갖는 견고한 느낌을 강화했다. 앞에는 못을 파서 ‘거울못’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하여 한국 건축에서 가장 사랑받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세를 갖추게 했다. 박 대표는 “박물관은 산과 물, 곧 남산과 거울못 사이에서 소중한 유물을 감싸고 있는 평온한 성곽의 개념을 담고 있다”고 했다. 이곳은 국보 74점, 보물 258점을 보유한 우리 전통문화의 최고·최대 보물창고다.
거울못은 박물관에 가면 처음 맞딱뜨리는 야외 풍경이다. 용산 지역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땅, 홍수가 나면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들어 고였던 땅에 건축가는 연못을 팠다. 물을 모아 관리함으로써 박물관에 수장 중인 국보급 유물을 ‘물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킨다는 실용적 목적도 있다. 수심은 고작 1m. 그럼에도 바닥에 짙은 색을 칠해 깊고 그윽한 풍정을 자아낸다.
이곳은 대개 직진해서 박물관으로 가지 않고 거울못을 끼고 에둘러 들어가도록 동선이 짜여져 있다. 박 대표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건물 크기에 비해 앞마당이 협소합니다. 직선으로 바로 가는 것은 멋이 없을 뿐 더러 건물로 인해 위압감을 느낄 것 같아 일부러 반원만큼 걸어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의 기념비적 문화시설이 한국성과 전통을 표상해야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건축평론가 박정현씨에 따르면 해방 이후 건축에 주어진 과제는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법주사 팔상전 지붕을 모방한 국립민속박물관(1968), 한옥 처마와 기둥을 연상시키는 세종문화회관(1978), 수원 화성에서 영감을 얻은 국립현대미술관(1986), 지붕을 갓 모양으로 얹은 예술의전당(1988) 등 80년대까지 지어진 대표적인 건축물들이 그러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대신 ‘추상적으로’ 한국성을 담아내고자 한다. ‘성벽을 닮게’ 지은 게 아니라 성벽의 견고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식이다. 열린마당은 전통 한옥의 안방(동관)과 건넌방(서관) 사이에 놓인 마루의 개념을 따왔다. 실내도 아니고 실외도 아니며, 다듬이질도 하고 밥상이 놓이기도 하는 등 다목적으로 활용이 되는 공간이다. 그날 BTS의 공연 무대가 됐던 것처럼.
용산기지 뒷문 열어 ‘뮤지엄 길’ 만들어야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은 섬이다. 박물관을 용산 미군기지가 바다처럼 삼면을 에워싸고 있어서다. 애초 용산 미군기지 내 남단의 골프장과 헬기장을 이전하면서 생긴 부지에 지은 탓이다. 문제는 정면도 막혀 있는 거나 마찬가지란 점이다. 8차선 도로가 놓였고 그 위를 차들이 쉴새없이 씽씽 달리니 체감 접근성은 제로다. 대개 횡단보도를 건너 쪽배를 타고 들어가듯 측면으로 들어간다. 8차선 남부순환도로가 정면을 가로지르는 예술의전당이 비슷한 처지의 처지가 비슷한 문화시설이다.
건물이 아무리 잘 생겼다 한들, 배산임수의 ‘믿음직한 성벽’이라고 한들, 정면에서 감상할 수 없다는 것은 이 건축물이 가지는 불운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답이 없는 건 아니다. 반환 완료 뒤에 국립 용산 도시공원으로 조성될 용산 미군기지 부지를 통과해서 박물관으로 가는 뒷길을 내면 된다. 정부의 지금 계획으론 2027년이 넘어야 공원이 개장된다. 진척상황을 보면 이보다 늦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반환절차가 완료되기 전이라도 지금 길을 내는 것은 어떨까. 이미 주한미군사령부의 인원과 시설 대부분이 평택으로 이전한 상황이다.
지난해 말 취재를 위해 용산기지 내 14번 게이트에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가는 뒷길을 걸어가봤다. 아모레퍼시픽 신사옥과 용산우체국 사이에 있는 이 게이트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국립중앙박물관 북쪽 담과 면한 작은 문이 나온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0년 이 박물관에서 선진 20개국(G20) 정상회의가 개최됐을 때 박물관으로 입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문이다. 이 문만 개방하면 그게 곧 박물관 북문이 되는 셈이다. 정면에선 제대로 조망되지 않던 국립중앙박물관의 뒤태를 보는데, 마치 잘 생긴 영화배우의 뒷모습을 보는 듯 두근거렸다. 모두가 그런 경험을 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박 대표는 2005년 현대해상화재보험 광화문사옥으로 한국건축문화대상 본상(국무총리상),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서울시민사랑상 대상을 수상했으며, 2006년 청계천문화관으로 건축문화대상 대상(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