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체제의 핵심인 평양도 코로나19의 직격탄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 최고지도부가 연일 평양시민들의 생활 보장을 강조하며 민심 달래기에 나서고 있는 것에서 평양의 민생고를 느낄 수 있다. 북한의 핵심 계층이 모여 사는 평양에서 민심 이탈이 발생한다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를 자력갱생으로 정면 돌파하겠다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연초 구상이 틀어질 수밖에 없다.
생필품 부족, 식수난에 쌀 배급 중단도
북한 외교관 출신 고영환 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은 최근 일본 요미우리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평양 중심부에 사는 당·군 간부 가족에 대한 쌀 배급이 지난 2~3월을 마지막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간부 본인에 대한 배급을 위해 전시 비축미 시설인 ‘2호 창고’를 일부 개방했다는 정보도 있다”고 전했다. 고위직 가족에 대한 쌀 배급을 중단할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라는 얘기다. 고 전 부원장은 “북한은 코로나19로 인해 체재의 내구력이 떨어지고 있다”며 “(1990년대 중후반에 겪은) ‘고난의 행군’이 다시 오는 것 아니냐는 동요가 확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난의 행군 당시에도 평양시민에 대한 배급은 유지됐다고 하는데, 지금은 이 배급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식수난이 심각하다는 정황도 포착됐다. 노동신문은 지난 2일 ‘수도 시민들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물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평양시민들의 사례를 소개했다. “우리 아파트는 장마철이면 맨 위층에 사는 세대들이 불편을 느끼며 살아 왔다”거나 “우리 마을은 지난 시기 전기 설비가 시원치 않아 애를 먹었다”는 불편 사항들도 전해졌다.
김재룡 내각총리는 지난달 말 내각 전원회의에서 양질의 생활용수를 제공하기 위한 중대 결정을 채택했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노후화된 수도배관을 보수하지 못하면서 고층건물 등에 수돗물을 공급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는데, 요즘은 수돗물 소독에 필요한 약품까지 부족해 상황이 더욱 좋지 않은 것으로 안다”며 “평양시민들 중 일부는 쫄장(손펌프)을 이용해 지하수를 퍼 올려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고 전했다.
이미 두 달 전부터는 평양의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보고됐다. 국가정보원은 지난 5월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올 초 코로나19를 막기 위한 북·중 국경 봉쇄 여파로 조미료와 설탕 가격이 급등하자 평양시민들이 생필품 사재기에 나섰다고 보고했다. 모든 물자가 최우선적으로 공급되는 평양조차 코로나발 경제난을 피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중국 세관 당국인 해관총서에 따르면 5월 북·중 상품 수출입 규모는 6331만5000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해 77%나 감소했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5월 말 평양 주재 영국대사관이 공관을 잠정 폐쇄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며 “외교관들이 떠날 정도로 평양의 사정이 좋지 않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평양종합병원 건설 ‘충성자금’ 지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달 7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에서 ‘평양시민 생활 보장’을 별도 안건으로 중요하게 논의했다. 김 위원장이 직접 평양 챙기기에 나선 것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2일 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선 평양종합병원 건설 상황을 점검했다. 김 위원장은 이 병원이 세계 수준의 시설을 갖추도록 ‘국가적인 강력한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했다. 평양종합병원은 지난 3월부터 평양 한복판에 짓고 있는 대형 병원으로, 북한의 올해 역점 사업 중 하나다.
일본 도쿄신문은 지난 5일 북·중 관계 소식통을 인용해 북한 당국이 이 병원 건설을 위해 해외주재자를 대상으로 1인당 100달러 이상씩 ‘충성자금’을 내라고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외화벌이가 한층 어려워진 상황에서 상납 지시가 떨어져 당사자들 사이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전했다.
핵심 계층 동요… 김정은 계획 빨간불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평양의 핵심 계층이 동요하고 있다는 우려 때문에 김 위원장이 직접 평양 민심 달래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김 위원장이 정치국 회의에서 매번 평양시민에 관해 언급하는 게 이례적”이라며 “올 초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며 중국과의 국경을 최소한으로 개방하고 있는 탓에 필요한 물자들이 제때 공급되지 않는 등 어려움이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평양이 휘청거리면서 자력갱생으로 제재 국면을 돌파하겠다는 김 위원장의 계획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김 위원장은 올 초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기어이 자력부강·자력번영해 나라의 존엄을 지키겠다”고 천명했었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사태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어 김 위원장의 고민은 더욱 깊어질 전망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달 ‘2020년 북한 경제, 1994년의 데자뷔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국가 중 하나는 북한이라고 지목했다. 한국은행은 2017년과 2018년 북한 경제성장률이 전년 대비 각각 3.5%, 4.1%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로 따지면 외환위기 규모의 충격을 연달아 경험한 셈인데, 이를 회복할 시간도 없이 코로나19라는 악재까지 더해진 것이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김 위원장이 중국의 지원을 ‘뒷배’ 삼아 평양 민심 달래기에 힘쓰며 한·미의 움직임을 살필 것으로 내다봤다. 조한범 위원은 “김 위원장이 중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한·미의 태도 변화를 살필 것”이라며 “남북 및 북·미 관계와 관련해 이렇다 할 진전된 조치가 없을 경우 대남 군사행동 계획 보류 결정을 철회하고 군사 도발에 나설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다만 전향적인 조치가 있을 경우 대화 테이블에 나올 가능성도 크다”고 덧붙였다. 최용환 실장도 “김 위원장 머릿속에는 ‘중국이 아무리 어려워도 북한은 도울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다”며 “중국의 지원 규모를 보며 우리 정부와의 관계 개선 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관측했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