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좀비는 괴물 같은 느낌이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 우리 이웃 또는 동료였던 사람이 좀비가 되죠. 적이면서 희생자인 복합적 모습이 K좀비의 가장 큰 특징인 것 같아요.”
2016년 영화 ‘부산행’으로 1000만 관객을 동원하며 K좀비물의 이정표를 세운 연상호 감독은 K좀비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부산행’의 속편 격인 ‘반도’ 제작보고회 자리에서였다. 이 설명에 따르면 한국 좀비들은 공포를 극에 더하기 위한 소재라기보단 일상 속에서 탄생하는 기묘한 존재다.
‘부산행’ ‘반도’ 등의 영화를 비롯해 tvN 드라마 ‘싸이코지만 괜찮아’ 등 근래 쏟아지는 좀비 코드를 활용한 콘텐츠들은 어김없이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좀비들을 등장시키고 있다. 가령 ‘#살아있다’의 좀비는 평범한 사람일 때의 성격과 직업적 성향을 갖추고 있는데, 좀비가 된 경비원은 순찰을 돌고 소방대원은 로프를 타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영화 속 좀비들은 때때로 폭력적으로 변하는 개개인의 은유처럼 보인다.
불안한 청춘의 표상, 좀비
국내에서 좀비는 더이상 마니아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호러는 곧 ‘귀신’이었던 국내에서 좀비가 사랑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1997년 당시 외환위기를 겪었고 청년이 되면서 ‘N포 세대’가 돼 취업난·주거난 등 사회적 불안을 경험했던 2030세대에 주목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한국 좀비물은 사회적 상실감을 공유했던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발전했다”며 “서양 좀비보다 한국 좀비가 복합적인 색을 띠는 이유는 그런 무의식적인 표상이 담겨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K좀비들은 더 함축적인 성격을 띠었다. ‘창궐’(2018)은 산 자도 죽은 자도 아닌 ‘야귀(夜鬼)’를 통해 조선시대 권력관계를 상징적으로 그려냈다. 국내외에서 찬사를 받은 ‘킹덤’에 대해 김은희 작가는 “배고픔 때문에 좀비가 된 민초와 권력에 눈이 멀어 허기를 느끼는 지배층들의 모습을 통해 권력의 허망함을 보여주고자 했다”고 설명한 바 있다.
새로운 표상을 담은 한국 좀비에 대한 해외 반응은 뜨겁다. 미국 매체들은 지난해 ‘킹덤’을 두고 “연출과 각본 모두 환상적이다. 익숙한 소재와 조선시대 배경이 합쳐져 특별한 장르물이 탄생했다”는 등의 호평을 쏟아냈다. ‘반도’는 올해 칸 국제영화제 공식 초청작으로 선정된 데 이어 세계 185개국에 선판매됐다. 좀비물 자체가 주목받게 된 객관적 환경도 호재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아포칼립스(종말) 콘텐츠에 관한 관심은 나날이 커지고 있다.
달리고, 꺾는 좀비의 출현
서인도제도에서 원주민 주술로 되살아난 시체를 의미하는 서양 좀비는 주술사 주문에 따라 움직이고 상대를 공격하는 공포의 존재일 뿐이었다. 이런 좀비들에 생명력을 부여하려는 최초의 시도는 서양에서 먼저 시작됐다. 바로 현대 호러영화사를 새롭게 쓴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다. 로메로 감독은 인종주의, 핵가족의 붕괴 등 현대사회의 불안감을 짚어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할리우드에서는 윌 스미스 주연의 ‘나는 전설이다’ 등 좀비 모티브에 대자본을 투입한 SF형태의 영화들이 강세를 보였다.
그런데, 해외에서 K좀비에 관심이 높은 이유는 상징성만이 아니다. 좀비의 괴기한 외양으로 승부하는 서구와 달리 한국 좀비들은 기괴한 움직임과 속도감으로 차별된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킹덤의 좀비들은 (‘워킹데드’ 시리즈로 대표되는) AMC 드라마 속 좀비들처럼 꾸물거리지 않고 훨씬 빠르다”며 “지금까지 좀비물 중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좀비 운동성에 주목한 연출은 그로테스크한 좀비가 낯선 국내 관객들이 느낄 이질감을 낮추면서도 서사적 탄력성을 더할 수 있는 영리한 전략이었다. 움직임의 모티브를 무용에서 찾는 방법도 유효했다. ‘부산행’과 ‘킹덤’에 온몸을 꺾는 본브레이킹 출신의 전영 안무가가 참여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반면 최근 ‘#살아있다’에는 현대무용 댄서 출신의 예효승 안무가가 참여했다. 벨기에 세드라베 무용단 출신의 예 안무가는 섬세한 움직임을 통해 좀비의 괴이함을 표현했다.
영화계에서는 K좀비물이 발전을 거듭할 것으로 예상한다. 좀비에 버무릴 수 있는 한국적 모티브가 무궁무진해서다. 정 평론가는 “K좀비가 한류를 일으킨 건 서양의 좀비에 귀신 등 동양적인 사고를 버무렸기 때문”이라며 “한국화된 좀비는 그 자체로 해외 팬들에게 새롭게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