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국 중앙은행과 정부가 정책 딜레마에 빠졌다. 3월 이후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에서 탈피하기 위해 시중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오히려 가계는 저축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6일 파이낸셜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올 들어 미국과 유럽, 아시아 주요국의 저축률(가처분소득 대비 저축액)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유로존의 가계 저축률은 올 1분기 16.9%로 지난해 4분기(12.7%)보다 4.2% 포인트 늘었다. 1999년 이후 최고치다. 매월 가계가 아닌 개인의 저축률을 산정하는 미국의 지난해 12월 저축률은 7.6% 수준이었으나 올해 4월에는 32.2%까지 치솟았다. 5월에 23.2%로 주춤해졌으나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한국의 1분기 가계 저축률은 전 분기보다 1.6 %포인트 늘어난 36.0%로 2018년 3분기(36.3%) 이후 최고치를 보였다. 영국은 1분기 8.6%에서 전 분기(5.4%)보다 3.2% 포인트 늘었다.
저축률이 오르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경기회복 속도에 대한 우려 때문으로 설명했다. 반면 영국중앙은행(BOE)의 앤디 홀데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 봉쇄 등으로 인한 비자발적 저축 규모가 불확실성 등에 대비한 저축보다 클 수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각국 정책 당국이 우려하는 것은 가계 저축이 증가할 경우 부양책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운용할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돈을 푸는 속도에 비례해 소비가 늘어나야 경기진작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저축만 늘어날 경우 소비 부진→경기회복 지연→높은 실업률 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할 수 있다.
최근 풍부한 유동성 공급에도 불구하고 실물 부문에서 디플레 가능성(소비자물가상승률이 저조한 것)이 커지는 것은 이와 연관이 깊은 것으로 풀이된다. 최근 한국 내에서 부동산 시장이 과열로 치닫고 주식시장의 랠리도 쉽사리 꺼지지 않는 것은 가계가 실물 소비 대신 ‘자산 소비’에 나서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실물 인플레가 억제되는 대신 주식 부동산 등 자산 인플레 현상이 가속화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으로 보인다. 금값이 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은 본격적인 자산 인플레의 신호탄으로 보인다. 위험자산인 주식과 안전자산인 금에 동시에 투자하는 것은 이례적인 현상이다. 최근 실물경제와 주가의 괴리가 커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실물 부문으로의 자금 유입이 없는 자산 인플레는 성장률 제고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거품 붕괴 시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다.
지난 5월부터 각국의 경제봉쇄가 풀려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억눌렸던 소비가 크게 늘어나고 있지만 코로나 확진자가 다시 늘어나면서 소비의 V자형 반등 기대가 다시 수그러들고 있다.
결국 3~4월과 같은 전면 경제봉쇄 수준으로 돌아가지 않는 대신 각국이 보건시스템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용하는가에 성패가 달려 있다는 지적이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