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두 번째 인생에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입력 2020-07-01 04:07

일이 있을 때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좋든, 싫든, 기쁘든, 아프든, 놀랍든, 무섭든, 이상하든, 신기하든, 일만 생기면 쪼르르 달려와 아이는 “아빠!” “아빠아!” “아아빠아아아!”를 불러댄다. 다섯 살쯤 됐을까. 두 갈래로 잘 땋은 머리가 허공을 낚시질한다. 만발한 꽃들과 매달린 열매들과 수시로 눈앞을 들락대는 나비가 아이의 호기심을 부채질한다. 아빠를 따라나선 산행이 아이는 즐겁기만 하다.

부르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에 정체를 부여한다. 벤치에 앉아 이웃의 ‘아빠-공주’ 놀이를 한동안 지켜본다. 아이는 남자를 불러 ‘아빠’를 생성하고, 남자는 아이를 불러 ‘공주’를 발명한다. 호기심을 충전할 때마다 ‘공주’는 까르르 웃으며 우아하게 꽃밭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자신을 스스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으로 자신을 호칭하느냐에 따라서 비로소 진짜 모습이 알려진다. 자신을 아직도 왕이라 여기고 싶어도, 상대가 이에 호응하지 않으면 더 이상 왕은 아닌 것이다. ‘리어 왕’에서 고너릴의 대사 한마디로 이 엄연한 진실을 선포한다. “사냥에서 돌아와도 인사도 안 할 작정이니, 아파서 앓아누웠다고 전해라.” 사냥을 다녀오는 리어의 귀환은 이제 왕의 귀환이 아니다. 입에 붙은 혀 같던 딸에 의해 그는 ‘아무도 아닌 자’로 전락한다. 고너릴은 덧붙인다. “멍청한 늙은이, 자기가 주어 버린 권력을 아직도 휘두르려고 하다니.”

선배들이 하나둘 은퇴를 시작하면서 안절부절못하는 경우를 본다. 자의반타의반 직장을 나온 친구들도 낯선 호명에 어리둥절한 경우를 자주 본다. 모임에서 서로를 호칭하는 ○사장, ○대표 등이 어색한 것이다. 부풀린 호칭은 과시를 좋아하는 우리나라 수컷 문화의 한 특징이지만, 이름과 실질이 일치하지 않는 상태는 사람을 불안하게 한다. 평생 일에 몰두했을 뿐 취미조차 없다면 내면의 공허를 이기기 힘들다. 때때로 초조를 견디지 못하고 준비 없는 창업을 서두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삼시 세 끼를 집에서 차려 먹는 ‘삼식이’가 최악의 호명임은 누구나 안다. 아내를 친구 삼아 유유자적, 대부분 언감생심이다. 가부장제에 길들어 감정 읽는 기술은 형편없고, 일 말고 생각한 적이 없는 눈치 없는 머리로 수다를 나누는 건 무리다. 대화를 흥미롭게 하기는커녕 한마디 툭 던지고 나면 말이 끊기기 일쑤다. 아내가 열불 내지 않도록 딴생각하지 말고 맞장구나 잘 쳐서 구박이나 면하는 게 경험상 최선인 듯하다.

목공을 배워 스스로 목수가 되거나, 텃밭을 일구며 땀 흘리는 농부가 되거나, 책 읽고 글 써서 작가가 되거나, 대학 등에 등록한 후 다시 공부를 시작해 학인이 되는 이들은 주변의 완전한 부러움을 산다. 이들은 기어이 행복의 비밀을 찾아낸 ‘아무튼 인생 고수’ 같은 느낌이다. 나이 들어 야망을 부리는 것은 대부분 주착이다. 또다시 세상을 호령하고 싶다는 마음은 두 번째 인생을 두 번째 불행으로 물들일 뿐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완벽한 행복은 배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욕구가 솟으면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행복은 아무 번민 없이 삶을 온전히 느끼는 데 달려 있다.

그런데 목수, 농부, 작가, 학인 같은 이름을 얻는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말하는 자가 아니라 내면의 귀를 기울여서 세계의 호명을 듣는 자라는 점이다. 나무의 울림을 듣는 사람이 목수가 된다. 땅의 속삭임을 듣는 사람이 농부가 된다. 스승의 소리를 듣는 사람이 학인이 된다. 글의 속삭임을 듣는 사람이 작가가 된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이, 거기.” 세계가 나를 호명할 때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내가 누구인지 드러난다. 허황함에 쏠리지도 않고, 허망함에 유혹되지도 않으면서 두 번째 삶에서 완전한 행복을 추구하고 싶다면, 먼저 물어야 한다. 지금, 나는 어떤 호명에 답하려 하는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