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된 인식은 대립만 낳아… 6·25 보는 시각 이젠 달라져야”

입력 2020-06-26 04:07

세계적 석학 브루스 커밍스는 6·25전쟁의 기원에 관한 그의 1981년, 1990년 저서를 통해 “누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는가? 이런 질문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북한의 남침이 6·25전쟁의 본질이라는 우리 사회의 도그마를 격하게 흔들었다.

커밍스는 전쟁이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항일 대 친일’ 등 구조적 내전의 산물이라고 선언했다. 친일파를 중용한 이승만과 미국이 북한의 전면전을 유도한 측면이 있다고 봤다. 커밍스의 주장은 이른바 ‘수정주의’로 분류됐다. 소련과 북한이 전쟁의 원흉이라는 ‘전통주의’와 반대되는 입장이어서다. 반공주의자들은 커밍스의 해석을 싫어했고 운동권과 반미주의자들은 열광했다.

커밍스의 주장은 이후 6·25전쟁 연구 경향을 좌우하는 하나의 ‘프레임’이 됐다. 반공이라는 도그마를 전쟁에서 벗겨내려던 커밍스의 시도가 역설적으로 반미라는 이념을 강화했다. 당시엔 획기적이던 커밍스의 주장은 1990년대 소련 비밀문서 등을 통해 반박되기 시작했다. 북한과 소련이 1950년 6월 25일 전면전을 사전에 계획하고 허가했다는 사실이 문서에 나타나 있었다.

커밍스의 주장이 일부 반박되고 북한의 남침설이 실증되면서 오히려 ‘반공 대 반미’라는 이념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는 1996년에 내놓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이라는 책에서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모두 극복하려고 했다. 진보 학자로 분류되는 박 교수는 북한 노획 문서 등 사료에 기반해 전면적인 6·25전쟁이 김일성 등의 주도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이념이 아니라 사실을 추구한 것이다. 그는 광복 이후 1948년 분단을 맞으며 생긴 ‘48년 질서’가 1950년 전쟁의 기원이 됐다고 봤다. 북한이 분단 구조 속에서 ‘급진 군사주의’에 경도됐고 전면전이라는 선택으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위 책을 쓴 뒤 운동권으로부터 ‘왜 북한에 비판적이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진보인줄 알았는데 왜 이러느냐’는 지적이었다. 친일과 항일, 반공과 반미의 이념 대결은 식민지 시기와 전쟁을 겪은 한국에서 극심했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이후 전쟁 연구에서 과도한 이념을 배제하려 노력했다.

민중의 전쟁 경험이 본격적으로 복원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다. 전쟁사·정치사 영역에 머물던 연구의 범위가 사회사·문화사로 확장됐다. 연구자들은 주변에 있을 법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다. 전쟁이 내 가족의 얘기가 된 것이다. 전쟁 미망인, 민간인 학살, 월북 가족, 학도병, 이산가족의 이야기가 전쟁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2000년 저서 ‘전쟁과 사회’에서 민중과 그들의 비극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극의 원인 및 책임 규명에 대한 연구가 그간 금기시됐다고 주장했다. 이는 이념 대결의 산물로 분석됐다. ‘소련과 김일성은 악, 미국과 이승만은 선’이라는 도식으로는 미군·국군의 민간인 학살을 설명할 수 없었다. 김 교수는 생존자 증언을 바탕으로 거창·함평 등지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연구의 주제로 삼았다.

민중들의 얘기는 구술로 채취됐다. 구술은 기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인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가장 직접적인 방식이다. 문서고에서 씨름하던 연구자들은 녹음기를 틀었다. 김귀옥 한성대 교수는 1990년대 말부터 이산가족과 월남민들을 직접 만나 이들의 삶을 역사로 만들었다. ‘반공이냐 친북이냐’의 질문이 그간 오갔지만 그가 만난 사람들은 반공전사도, 빨갱이도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의 2004년 저서 ‘이산가족’에 담겨 있다. 이임하 성공회대 교수는 ‘전쟁 미망인, 한국 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라는 책을 2010년에 냈다. 군경 미망인, 피학살자 미망인 등 45명을 인터뷰했다. 20대에 과부가 돼 행상과 좌판을 벌여 자식을 키운 이들, 사라진 남편을 찾아 헤맨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정치권은 6·25전쟁 70주년에 다시 이념을 소환했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의 국립현충원 안장 논란이 단적인 예다. 백 장군은 독립군을 토벌했던 일본군 간도특설대에서 1943년부터 약 3년간 복무했다. 진보 진영은 이 때문에 그를 친일파라고 몰아세웠고, 보수 진영은 백 장군이 6·25전쟁의 영웅이라는 점만 강조했다. 인간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이념에 밀려 사라졌다. 정치권은 대립의 역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김동춘 교수는 25일 “전쟁이 엄밀하게 보면 계속되고 있어 이념 대립이 지속되고 있다”며 “공로를 인정할 부분은 하고 비판할 부분은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비판할 수 있는 부분을 막아버리는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종전선언이 이뤄지기 전까지 문제는 지속될 것”이라며 “역사 교육과 민주화가 획기적으로 진전되면 대립이 조금은 해소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귀옥 교수는 “사회인식 자체가 여전히 편향돼 있다”며 “전쟁 등을 객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어떤 ‘악’을 정해놓고 그것으로 모든 현상을 바라보는 인식은 결코 건강하지 않다”며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한 피해의식은 사회의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재 통일 교육이 더 강화돼야 하며 이산가족 등 전후 인구 통계가 재정비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임하 교수는 “전쟁고아, 미망인, 피학살자 유가족 등 사람들의 일상과 여성의 다양한 이야기들이 연구돼야 한다”며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통해 전쟁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6.25전쟁 70주년]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