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적인 인간이다. 활동반경도 좁아서 어지간하면 집의 세력권 안에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자면 거의 집에 있거나 집 근처 카페나 바 정도에만 오간다는 이야기다. 외출은 늘 마음 단단히 먹고 해야 하는 이벤트지만 가까운 단골 가게들은 이제 거의 ‘우리 집 거실’의 느낌이라 그나마 수월히 다니는 것 같다.
이처럼 집을 사랑함에도 나는 종종 이국 타지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하지만 여행을 떠나서도 행군개미처럼 종일 걷는다거나, 명승고적을 줄줄이 찍고 온다거나 하진 않는다. 숙소 인근의 바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그림을 그리고, 동네 카페에 앉아 시집을 읽고, 걸어서 닿을 거리의 공원에서 정수리를 덥히는 정도가 내가 하는 여행이다. 말하자면 고국에서 하던 짓을 배경만 바꿔 똑같이 한다고나 할까. 심지어 외국 여행도 날짜가 길어지면 하루 정도는 온전히 숙소에 박혀 있기도 한다. 한때는 이 비싼 돈을 주고 외국까지 와서 아무것도 관광하지 않는 것에 가책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제는 나라는 인간의 특성을 깨닫고 적당히 봐주는 편이다.
그렇게 느슨히 다니는 주제에 나는 여행이 길어지면 쉽게 지치곤 한다. 나는 이를 ‘여행체력의 고갈’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여행체력이란 이곳저곳 쏘다니는 데 쓰는 육체의 능력을 말하기도 하지만 절반 정도는 ‘집을 떠나 버틸 수 있는 마음의 역량’을 표현하는 말이다. 나와 같은 집의 황제들은 공감하겠지만, 여행이 길어지면 오래 입은 파자마처럼 익숙하고 편안한 내 집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곤 한다. 이 향수가 지나치게 깊어지면 그 어떤 이국적인 음식도 기기묘묘한 풍경도 피로하기만 하다. 하얀 침구가 사각거리는 호텔도 그리 편안하지 않다. 나의 심신은 그저 내 집만을 그리워할 뿐.
이 향수병이 절정에 다다른 것은 몇 해 전 떠났던 포르투갈 여행에서였다. 홀로 떠난 여행인 데다 장기 일정이었다. 포르투갈은 호스텔 시설이 좋기로 유명하다기에 거의 모든 숙소를 호스텔로 정했는데 이것이 나의 패착이었다. 물론 모든 호스텔이 소문만큼 훌륭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곳의 개방성이었다. 내가 집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곳이 자발적 고립의 장소이기 때문인데 호스텔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침대가 켜켜이 쌓인 방에는 늘 누군가 속옷을 늘어놓고 자고 있거나 트렁크를 펼쳐놓고 짐을 꾸리고 있었다. 라운지로 피신하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소리치며 축구를 보고 있거나 화상채팅으로 먼 곳의 가족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혼자가 되어 영혼을 쉴 수 없는 그곳에서 나는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는 고국의 친구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었다. ‘오랜 여행 끝에 깨달았어. 나 여행을 별로 안 좋아하나 봐.’ 그때 친구가 웃으며 건넨 말은 이것이었다. ‘응. 하지만 그걸 느끼러 또 떠나겠지.’ 그때는 웃어넘겼던 그 말이 사실이 되어 나는 그 후에도 숱하게 여행을 떠나고, 집을 그리워하고, 더 멀리 여행을 떠나고, 더 간절히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곤 했다. 어쩌면 나의 여행은, 너무도 사랑하는 집과 나 사이에 권태기가 올까 봐 애써 떠나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더 멀리 떠나서 더 사무치게 그리워하기 위해.
어디로도 떠날 수 없는 이 시점에 이러한 글을 쓰는 까닭은 막상 어디에도 갈 수 없으니 청개구리처럼 또 여행이 간절하기 때문이다. 목덜미에 감기던 방콕의 눅눅한 밤공기, 샹그리아 속 얼음처럼 반짝이던 바르셀로나의 바다, 회색 커튼 같던 런던의 비까지 모두 그립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기 먼 나라의 누군가는 내가 사는 이 도시를 그런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있지 않을까. 갈 수 없는 서울아, 구름을 짊어진 고궁도, 노을에 물든 한강도, 빛 조각이 흩뿌려진 야경도 모두 제대로 있는 거니,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거니, 하고 애달파하고 있진 않을까.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안녕하세요. 서울은 잘 있습니다. 꼭 안녕하길 바랍니다. 당신도 당신의 도시도. 우리 꼭 다시 만나요.
홍인혜 시인·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