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힌다”…프랑스판 ‘플로이드 사건’ 있었다

입력 2020-06-25 04:05
지난 1월 프랑스 경찰의 과잉 제압으로 숨진 배달원 세드리크 슈비아(43)의 부인 도리아 슈비아(가운데)가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전역을 인종차별 항의 시위로 뒤덮이게 만든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과 유사한 사건이 지난 1월 프랑스에서도 일어났다. “숨이 막힌다”는 사망자의 마지막 육성이 뒤늦게 현지 언론에 공개되면서 경찰 폭력에 대한 공분이 일고 있다.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와 탐사보도 전문매체 메디아파르는 23일(현지시간) 북아프리카 출신 배달 노동자 세드리크 슈비아(43)가 지난 1월 3일 경찰관에게 목이 짓눌려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20초 동안 7차례에 걸쳐 “숨이 막힌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보도했다.

경찰이 도로에 엎드린 슈비아의 목을 짓누르는 영상은 이미 지난 1월 세상에 알려졌으나 그의 마지막 육성이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두 언론은 슈비아의 휴대전화에 녹음된 음성, 체포에 관여한 경찰관과 목격자가 촬영한 13개의 동영상 등을 분석해 사건의 상세한 전말을 전했다.

슈비아는 사건 당시 스쿠터를 타고 에펠탑 근처 케브랑리 박물관 앞을 지나가다 경찰의 불심검문을 받았다. 지저분한 번호판을 달고 주행 중 휴대전화를 보고 있었다는 이유였다.

화가 난 슈비아와 경찰관 4명은 약 12분간 거친 말을 주고받으며 실랑이를 벌였다. 이어 제압에 나선 경찰관들이 슈비아의 팔을 뒤로 비틀고 바닥에 엎드리도록 한 뒤 목 뒷부분을 짓눌렀다.

호흡곤란을 호소하던 슈비아는 5분 만에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됐으나 이틀 뒤 숨졌다. 부검 결과 사인은 외력에 의한 질식과 후두부 골절로 확인됐다. 영상 속에서 양측은 서로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며 반복적으로 외치고 있지만 슈비아가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등 명백한 위협을 가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고 르몽드는 전했다.

프랑스 경찰은 사건 발생 후 반년 가까이 흐른 지난 17일에야 연루된 경찰관 4명을 입건하고 감찰조사를 시작했다. 가해 경찰들은 입건되는 당일까지도 별다른 징계나 조사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측 변호사는 “슈비아가 헬멧을 쓴 채 말을 해서 경찰들이 ‘숨이 막힌다’는 그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슈비아의 딸 소피아 슈비아는 이날 파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 가족들은 왜 가해 경찰들이 아직까지도 정직당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이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직접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고 촉구했다.

유족 측 변호사도 기자회견에서 “프랑스는 미국이 아니지만 점점 더 미국을 닮아가고 있다”며 목 누르기 등 경찰의 과도한 제압 방식을 철폐하라고 강조했다.

격렬한 시위가 잦은 프랑스에선 경찰이 집회 진압 등에서 과도한 물리력을 사용하는 일이 관행처럼 용인돼 왔다. 용의자 제압 과정에서 경찰이 목 누르기 등 가혹 행위를 하는 일도 만연했다.

그러나 플로이드 사망 사건은 프랑스에서도 경찰 폭력 문제를 다시 보게 했다. 특히 젊은 흑인과 아랍 출신 남성들에게 경찰 폭력이 집중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면서 프랑스 인종차별 항의 시위에서도 경찰 개혁 요구가 커졌다.

크리스토프 카스타네르 프랑스 내무장관은 지난 8일 목 누르기 제압 방식을 폐지하고, 경찰학교에서도 가르치지 않겠다며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하지만 경찰노조가 “내무부의 결정은 경찰 무력화를 초래해 공권력을 땅에 떨어뜨릴 것”이라며 반발하자 폐지 결정을 9월 이후로 유예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