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한테 6·25전쟁을 물어보면 ‘일제침략전쟁 아니냐’고 물어봐요.”
경기도 여주에서 2002년부터 교통 정리와 역사 강연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6·25전쟁 참전용사 김학명(90·사진)씨는 24일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미래 세대들이 6·25전쟁을 잊어가는 것을 퍽 안타까워했다.
김씨는 동네에서 ‘호루라기 할아버지’로 불린다. 김씨가 2002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초등학교 앞에서 등교하는 아이들을 위해 교통정리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봉사시간) 1만 시간을 채우는 게 목표”라며 활짝 웃었다.
그는 가끔 역사교사 역할도 맡는다. 학생들을 상대로 6·25전쟁이 어떻게 발발했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려주는 강연을 진행한다. 김씨는 “6·25전쟁을 일제침략과 구분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고 북침 전쟁이라고 착각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럴수록 역사 교육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열의가 생긴다”고 강조했다.
김씨가 봉사활동가로 변신하게 된 배경엔 참전용사로서 조국 수호에 앞장섰던 젊은 날의 기억이 자리한다. 1931년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그는 6·25전쟁 발발 이듬해 육군 1102야전공병단 1510부대에 배치됐다. 도로와 다리를 건설해 국군의 진군을 돕는 게 김씨의 임무였다.
김씨는 처음 배속됐던 강원도 홍천군의 처참한 모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북한군이 휩쓸고 간 개울가에 아군과 적군의 시신이 널브러져 썩어가면서 고약한 악취를 풍겼다”고 회상했다. 며칠간 주어진 그의 첫 임무는 사방에 쌓여 있던 시신을 파묻는 작업이었다고 한다.
전우의 안타까운 죽음을 수없이 목도해야 하는 것 역시 살아남은 자의 숙명이었다. 강원도 진부령에서 길을 터는 폭파작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김씨는 “갑자기 폭약이 터지면서 옆에 있던 동료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산화했다”며 “이런 사고는 전쟁기간 중 몇 번이나 반복됐다”며 말끝을 흐렸다.
전쟁 때문에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이 김씨에겐 가장 큰 상처다. 부대는 당시 전시 교육 중이라는 이유로 한 달이 지난 후에야 김씨에게 비보를 알렸다. 김씨는 “고향에 내려가 가족을 보자마자 터져나온 눈물을 한동안 멈출 수 없었다”고 했다.
‘도로 위 노병’ 김씨는 앞으로도 미래 세대에 6·25전쟁을 제대로 알리는 일에 매진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삐라(대북·대남전단) 살포와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파괴 등으로 남북 관계가 다시 악화된 것이 안타깝다”며 “이럴수록 남북이 통일돼 모두가 잘 사는 날이 와야 한다는 걸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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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