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환상은 금물, 원칙이 최선

입력 2020-06-25 04:04

한 달 가까이 우리 측을 몰아붙이던 북한의 협박 공세가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3일 당 중앙군사위원회 예비회의에서 대남 군사행동 계획 보류를 지시했다. 파국으로 치달을 듯했던 남북 관계가 잠시나마 ‘일단 멈춤’ 상태로 가게 됐다.

지금은 여동생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끊임없이 수위를 올려놓았던 한반도 위협지수를 오빠 김정은 위원장이 일단 보류해 놓은 상황이다. 정부가 대북전단살포금지법을 추진하고, 통일부 장관이 사퇴하고, 외교안보라인 쇄신론이 나오고, 남남갈등도 벌어졌으니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는 얻었다는 판단 때문일 듯하다. 군사 위협을 행동에 옮겼을 때 상황이 더 악화될 수 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낙관은 금물이다. 말을 뱉으면 행동에 옮기는 북한 체제 특성상 대남 협박과 도발은 언제든 다시 현실화될 수 있다. 김 위원장이 중앙군사위 본회의가 아닌 예비회의에서 결정하고 그것도 ‘보류’ 표현을 쓴 것은 언제든 대남 위협을 재개할 수 있다는 뜻이다. 김 위원장 한 명의 지시에 따라 하루아침에 협박하고 또 취소할 수 있는 상황은 그래서 더욱 위험하다.

길게 볼 것도 없이 최근 상황만 되짚어보자. 2013년 봄, 2015년 여름, 2017년 가을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7년 전 북한은 3차 핵실험에 따른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논의에 맞서 ‘핵 선제타격’ ‘자위적 군사행동’ ‘남북 불가침합의 파기’ 등으로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를 거세게 위협했다. 또 북한 주민들에겐 전투식량을 준비할 것을 지시했다. 5년 전 여름 비무장지대(DMZ) 목함지뢰 사건이 불거지자 북한은 준전시 상태까지 선포했다. 3년 전 가을에도 북한은 남측과 미국을 겨냥해 온갖 위협을 가했다. 미 본토까지 타격이 가능하다고 했고,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화염과 분노’로 상징되는 대북 행동 계획까지 검토했다.

그런데 지난 2년 반 남북 화해 무드는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이은 남·북·미 정상회동까지 유례없는 정치 이벤트들을 만들어냈다. 이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핵 없는 한반도, 종전선언, 나아가 항구적인 평화체제 수립까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였을 것이다.

그러던 북한이 돌변해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까지 폭파하고 군사 도발을 위협했다. 이들의 최근 행태는 많은 사람에게 혼란을 안겨줬다. 한반도 운전자와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던 문재인 대통령 역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계속돼온 북한과의 대화, 합의, 약속을 그들이 얼마나 깨버렸는지 아는 이들에게 이 상황은 그리 큰 반전이 아니다.

이런 참에 정성장 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장이 현 상황에 대한 조언을 한 가지 했다. 2015년 8월 DMZ 목함지뢰 사건에 대한 정부의 대처 방식이다. 당시 북한이 DMZ 우리 지역에 설치한 목함지뢰로 부사관 2명이 중상을 입었다. 정부는 11년 만에 대북 확성기를 통한 심리전 방송을 재개했다. 북한은 ‘전쟁’ 운운하며 강하게 나왔지만, 정부의 단호한 태도에 밀려 노동당 중앙위 대남비서와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접촉을 제안했다. 정부는 나아가 북한군 총정치국장도 나올 것을 요구했다. ‘2+2 남북 고위급 접촉’을 성사시켰고, 결국 북한의 ‘유감’ 표명을 받아냈다. 정 센터장은 북한 도발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되면 정부가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제언했다.

상당 부분 동의한다. 핵 없는 한반도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 수립은 아직은 먼 미래다. 환상은 금물이고, 분석과 대응은 냉철해야 한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근본적 상황 변화가 수반되지 않은 평화 제스처나 위협에 휘둘려선 안 된다.

남혁상 정치부장 hs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