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원님’ 대신 ‘정훈님’, 전용차 대신 자전거… 딱딱하던 국회가 변했다

입력 2020-06-27 04:05

더불어민주당 전용기 의원은 최근 보좌진 7명에게 슬리퍼를 선물했다.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딱딱한 구두 대신 편안한 슬리퍼를 신고 일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전 의원은 26일 “하루 종일 구두를 신고 있는 모습이 불편해 보였다. 사무실에서는 다 같이 슬리퍼를 신고 일하자는 마음에서 직접 골라 선물했다”고 말했다.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실에서는 ‘의원님’ 소리가 사라졌다. 보좌진은 조 의원을 ‘정훈님’으로, 조 의원도 보좌진을 ‘○○님’으로 부른다. 효과는 어떨까. 최병현 보좌관은 “직급이 주는 위압감이 없다. 누구든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정훈님과 직접 소통할 수 있다. 신속한 일처리가 가능하다. 업무 효율성 면에서 훨씬 낫다”고 말했다.

21대 국회 의원회관에 ‘탈권위’ 풍경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많은 의원이 일상 속 의전을 내려놓고 다양한 방법으로 보좌진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있다. 형식적이고 번거롭던 의전과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하면서 보좌진 사이에서도 “업무하기 수월해졌다”는 반응이 나온다.

소통을 강조하는 의원실일수록 호칭의 변화가 눈에 띈다. 조 의원실뿐 아니라 민주당 이용우 의원실에서도 ‘의원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방에선 서로를 영어 별칭으로 부른다. 카카오뱅크 대표 출신인 이 의원은 ‘의원님’이 아니라 영어 이름 ‘얀(Yan)’으로 불린다. 보좌진도 ‘폴’ ‘마부스’ ‘션’ 등 다양한 영어 이름으로 불린다. 직함을 떼고 별명을 호칭으로 삼는 민간 기업 문화를 의원실에 적용한 것이다.

전북 전주 지역구에서 전용차량 대신 자전거를 타고 이동하는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성주 의원실 제공

의전 간소화로 국민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의원도 있다. 민주당 김성주 의원은 전용차량과 수행비서 없이 지역구(전북 전주병)에서는 자전거, 서울에서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김 의원은 “과거엔 전용차량과 수행비서를 뒀는데 익숙해지다 보니 의존성이 심화됐다”며 “국회의원은 대접받는 사람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수행비서를 두지 않고 전용차량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의원들이 국회 안에서 이동할 때도 차를 타고,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수행비서를 거느리고 다니던 예전과 비교하면 크게 달라진 풍경이다.

보좌진과 원탁테이블에 둘러앉아 회의를 하고 있는 이용 미래통합당 의원. 이용 의원실 제공

보좌진과의 수평적 관계를 위해서도 다양한 변화가 시도되고 있다. 초선인 미래통합당 이용 의원은 사무실에 6인용 원탁테이블을 들였다. 그는 보좌진과 원탁에 둘러앉아 ‘맨투맨 의정활동 과외’를 받는다. 위계질서가 강하다고 여겨진 통합당에선 쉽게 볼 수 없던 장면이다. 이 의원은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동등한 입장에서 보좌진과 이야기하며 성장하고자 하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자리 배치를 통해 보좌진의 급수별 위계를 흐트리기도 한다. 문재인정부 청와대 국정상황기획실장을 지낸 윤건영 민주당 의원실은 제비뽑기를 통해 자리 배치를 결정했다. 사무실 입구는 보통 인턴비서나 6~9급 비서의 자리다. 하지만 윤 의원실에 들어가면 4급 보좌관 책상부터 마주친다. 통합당 한무경 의원실도 보좌관 2명의 자리를 입구에 배치했다. 이들 의원실은 “직함에 구애받지 않고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무실에서 직접 커피를 내리고 있는 박수영 통합당 의원. 박수영 의원실 제공

통합당 박수영 의원실에서 ‘커피는 셀프’다. 박 의원은 사무실 한쪽에 셀프서비스 공간을 만들었다. 벽에는 ‘박수영 의원실은 차와 커피가 셀프입니다’라는 문구를 붙였다. 박 의원은 “국회는 입법을 하고 주요 정책을 다루는 곳”이라며 “이 일을 하기에도 한 사람의 인력이 아까운데 커피를 전담해서 타는 직원이 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좋은 정책과 입법에 매진하는 게 옳다”고 말했다.

업무 방식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과거엔 시도 때도 없이 의원이 찾으면 달려가는 게 보좌진의 일상이었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일과 개인 생활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보좌진의 업무 패턴도 달라지는 추세다.

민주당 김진표 의원은 보좌진을 상대로 ‘주4일 근무제’ 실험에 들어갔다. 한 주에 1명이나 2명씩 4일만 출근한다. 보좌진이 창의력을 발휘하며 일하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하다는 김 의원의 생각에 따른 것이다. 업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보좌진이 개인적 용무로 일하는 날을 조정할 수 있다. 외국계 기업에서나 가능한 유연근무제를 도입한 셈이다. 김 의원실 측은 “다른 의원실 보좌진이 부러워한다”면서도 “한편에선 의원실이 제대로 돌아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실은 퇴근시간이 되면 업무 메신저가 ‘방해금지 모드’로 자동 설정된다. 스타트업에서 주로 쓰는 협업특화 메신저 ‘슬랙(Slack)’을 사용하는 덕분이다. 장 의원실 관계자는 “직원들이 눈치보지 않고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자는 차원에서 슬랙을 쓴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

이 같은 변화는 21대 국회에 2030세대 의원이 여럿 입성한 영향이 크다. 지역구 6명과 비례대표 7명이 2030세대다. 이들 13명 중 3명은 1990년대생이다. 초선 의원 비율이 높아지면서 과거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보좌진 구성도 다채로워졌다. 일용직 노동자와 기업 임원, 변호사, 탈북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국회로 들어왔다.

의원실의 탈권위 바람에 대한 평가는 일단 긍정적이다. 이종태 통합당 보좌진협의회장은 “원내대표가 초선들에게 지나친 의전을 삼가라고 공지를 내렸던 시대와 달리 지금은 누가 얘기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의전을 축소하는 분위기”라며 “긍정적으로 본다”고 말했다.

다만 이런 흐름이 일하는 국회, 생산성 있는 국회로 연결되기 위해선 보좌진 채용 구조를 보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조현욱 민주당 보좌진협의회장은 “호칭을 바꾸고 구두를 못 신게 하는 탈권위 문화 정착도 좋지만 보좌진의 고용 불안정성이 해소돼야 마음껏 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재현 김이현 기자 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