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용 마약 오남용 환자·병원, 시스템으로 걸러 잡아낸다

입력 2020-06-27 04:03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의료용 마약류 오남용 환자나 의료기관을 적발하기 위해 2018년 5월부터 마약류통합정보관리시스템을 가동 중이다. 오른쪽 아래 여섯 개로 분할된 화면은 식약처 위탁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 마약류통합정보관리센터의 모니터를 촬영한 것이다.

마약류통합정보관리시스템(마통시스템)이 가동된 지 6개월째인 2018년 10월, 충남 보령에 사는 40대 여성 A씨는 동네 병원에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으러 갔다. A씨가 병원 한쪽에서 자신의 진료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식품의약품안전처 마약감시원이 병원을 찾았다. 사망자 명의로 주기적으로 식욕억제제를 처방받은 A씨를 찾기 위해서였다. 감시원은 A씨가 병원을 방문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점에 맞춰서 갔고, 환자가 병원 내에 있음을 확인한 뒤 경찰에 연락해 A씨는 현장에서 붙잡혔다.

‘마약청정국’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국내 마약사범 수는 매년 늘어나고 있다. 프로포폴, 졸피뎀 등 의료용 마약류는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됐다. 정부는 세계마약퇴치의 날(6월 26일)을 맞아 ‘마약류 투약자 등 특별자수기간’을 운영하고 있다.

식약처는 A씨와 같이 의료용 마약류 오남용 환자나 의료기관을 잡아내기 위해 2018년 5월부터 마통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의료용 마약류를 취급하는 제조 및 도매업자, 약국을 포함한 의료기관 등은 이 시스템에 의무적으로 가입해 마약류 취급 현황을 보고해야 한다. 지난 3월 31일 기준 총 5만3503개 기관이 보고한 2억3738건의 정보가 시스템에 누적돼 있다.

입력 대상은 49개 마약 성분 400여 품목이다. 식약처 위탁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한국의약품안전관리원이 주제별로 시스템을 가동해 점검 대상자를 추출한다. 식약처 관계자는 26일 “시스템 가동 전 20%에 불과했던 적발률은 가동 후 50%까지 높아졌다”고 했다.

오남용 환자들은 각양각색의 방법으로 마약류를 처방받는다. 기존의 처방전을 복사해 여러 약국에서 처방받는가 하면 처방전을 잃어버렸다고 병원에 졸라 다시 받기도 한다. 본인이 직접 처방전을 위조한 사례도 있다. 부산에 사는 여성 B씨(31)는 근무했던 병원의 처방전 양식을 퇴사하면서 빼돌려 그대로 베꼈다. 해당 병원의 경우 수기로 처방전을 작성하고 있어서 위조가 가능했다.

B씨는 이런 방법으로 1년간 식욕억제제 펜디메트라진을 54회에 걸쳐 5400정을 구매했다. 무려 900일을 복용할 수 있는 양이다. 식약처 관계자는 “B씨의 처방 정보를 확인하러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내가 써준 적도 없는 처방전’이라며 황당해했다”고 말했다.

무조건 마약류를 많이 처방, 투여했다고 점검 대상이 되는 건 아니다. 의사가 본인에게 마약류를 투여한 경우 등 의심스러운 정황이 포착되면 점검 대상으로 분류한다. 유명식 의약품안전관리원 마약류통합정보관리본부장은 “의사 본인의 치료를 위해 투여했다면 불법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의심의 여지는 있다”고 했다.

마통시스템에 등록된 정보는 수사기관에서 중요한 증거자료로도 활용된다. 지난 2일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공포되면서 지방자치단체와 대검찰청, 경찰청 등의 기관에 마약류 빅데이터를 제공할 수 있는 법적 기반이 마련됐다. 시스템 가동 전 수기로 마약류 취급 현황을 기록할 때는 기록물이 남아 있지 않아 피의자를 검거해도 유죄 입증이 어려웠는데 이젠 정보가 반영구적으로 남아있어 검·경의 수사 협조 요청도 늘고 있다.

마약류 불법사용 및 관리 미비에 대한 행정처분도 강화됐다. 병·의원이 의료용 목적 외로 마약류를 사용한 경우 내려지는 행정처분 기준이 업무정지 6개월에서 12개월로 늘었고, 처방전에 따라 투약하지 않거나 거짓 처방한 경우도 업무정지 1개월에서 6개월로 대폭 강화됐다. 의료용 마약류의 도난·분실에 대해서도 업무정지 1개월 처분이 신설됐다.

그동안 마약류 취급 기관에 집중됐던 관리 대상은 올해부터 오남용 환자에게까지 확대됐다. 지난 4일부터 ‘마약류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을 통해 의사가 환자의 마약류 투약 이력을 확인하고 오남용이 우려되는 경우 처방, 투약하지 않을 수 있는 법적 근거도 생겼다. 식약처 관계자는 “환자를 대면한 것 자체만으로 진료에 해당하며, 처방할지 여부는 의사의 권한이어서 진료 거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처방받은 약에 마약류가 포함돼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됐다. 마통시스템에 주민번호를 입력해 투약받은 약에 마약류가 있는지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본인 명의가 도용됐는지도 확인 가능하다. 마약류를 처방받지 않았는데 처방받은 것으로 나오면 곧바로 신고할 수 있다.

시스템을 통해 마약류 오남용 환자를 특정할 수 있게 됐지만, 식약처가 직접 단속할 권한이 없는 건 한계다. 환자를 확인해도 수사기관의 협조가 있어야만 잡을 수 있다. 식약처에 마약류 단속에 대한 특별사법경찰 권한을 부여하는 법안이 20대 국회에 제출됐지만 폐기됐다.

인력 부족도 문제로 지적된다. 식약처는 다음 달 1일 현장대응TF를 재정비하는 데 총 인원이 10여명에서 19명으로 늘었지만 TF 상주 인력은 6명에서 2명으로 줄었다. 비상주 인력은 다른 업무를 하다가 필요할 때만 단속에 투입돼 충분한 대응이 불가능하다. 식약처 관계자는 “시스템을 통해 오남용 의심 환자를 관리하려면 인력 충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글·사진=김영선 기자 ys8584@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