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볼턴 전 미국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 일이 일어난 방’은 북·미 양자 및 남·북·미 3자 간 협상의 전반적인 흐름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한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볼턴 전 보좌관이 트럼프행정부의 대외 정책 방향을 완전히 오해했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당시 내외신 보도와 공식 브리핑 등을 통해 공개됐던 일부 사실을 회고록 내용과 비교해보면 들어맞는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문제는 ‘슈퍼 매파’로 꼽히는 볼턴 전 보좌관이 자신의 초강경 대북관을 회고록에 노골적으로 투영함으로써 사실관계까지 왜곡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행정부 외교안보팀에 뒤늦게 합류했던 볼턴 전 보좌관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에게 밀려 대북 정보도 제대로 공유받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볼턴 전 보좌관이 이런 정보 공백을 자신의 극단적 해석으로 채워 넣으면서 한반도 정세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볼턴 전 보좌관의 회고록 중 특히 악의적인 부분은 지난해 6월 30일 판문점 남·북·미 정상회동 때 북·미가 문재인 대통령의 참석을 원치 않았다는 주장이다. 만에 하나 그들이 난색을 표했더라도 문 대통령은 반드시 참석해야 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싱가포르와 베트남처럼 장소만 빌려주고 빠지라는 것은 한반도 당사자인 남한으로서는 외교적으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미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23일 “우리 영토인데 북·미 정상 둘이 만나라고 할 수 없다. 문 대통령도 당연히 가는 게 맞다”며 “회고록을 보면 우리 정부가 생각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많이 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게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해석의 영역”이라고 말했다. 최용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안보전략연구실장은 “당시 문 대통령이 빠졌다면 ‘한반도 운전자’라더니 테이블에도 못 앉았느냐는 비판이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는 볼턴 전 보좌관이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왜곡했다는 불만이 많다. 볼턴 전 보좌관은 판문점 회동 전날인 지난해 6월 29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한·미 정상 만찬에 불참했다. 볼턴 전 보좌관은 이튿날 열린 한·미 소인수회담에만 참석한 뒤 판문점에 가지 않고 몽골 방문을 위해 출국했다. 미 언론은 터커 칼슨 폭스뉴스 앵커도 동행했던 판문점 회동에 볼턴 전 보좌관이 빠진 것을 두고 당시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판문점에서 세 정상이 만나기 전날 청와대 환영만찬에 볼턴 전 보좌관은 없었다”며 “만찬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트럼프 대통령 사위 재러드 쿠슈너 선임보좌관도 참석해 김현종 국가안보실 2차장과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눴는데 정작 볼턴 전 보좌관은 그 자리에 없었다”고 말했다. 볼턴 전 보좌관은 한국 입국 당시에도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 탑승하지 못하고 따로 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 일각에서는 볼턴 전 보좌관이 대북 정보를 얻었던 핵심 통로가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온다. 대북 정보력에서 폼페이오 장관에게 밀리자 정 실장을 대안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볼턴 전 보좌관은 재임 시절 정 실장과 활발하게 소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 실장이 볼턴 전 보좌관의 회고록 내용이 공개된 직후 즉각 반박 자료를 내며 격앙된 반응을 보인 것도 이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8년 3월 ‘순간적 충동’으로 북·미 정상회담을 수용했다는 볼턴 전 보좌관의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는 평가다. 1차 북·미 정상회담은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김상균 국가정보원 2차장과 맹경일 북한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 앤드루 김 미 중앙정보국(CIA) 코리아미션센터장 3자 간 비밀 접촉에서 물꼬가 트였고,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방남 이후 더욱 구체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CIA 국장이던 폼페이오 장관으로부터 접촉 내용을 보고받았을 트럼프 대통령이 충동적으로 결정을 내렸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볼턴 전 보좌관은 남·북·미 대화가 상당히 진전된 뒤인 그해 4월에야 백악관에 합류한 인물이다.
종전선언이 우리 측 의제였다는 볼턴 전 보좌관의 주장은 사실관계 자체는 맞다. 종전선언은 조성렬 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이 노무현정부 시절인 2006년 처음 구상했으며 이듬해 10·4 남북정상선언에 ‘직접 관련된 3자 또는 4자 정상들이 한반도 지역에서 만나 종전을 선언한다’는 문구로 반영됐다. 볼턴 전 보좌관이 종전선언을 ‘북한 아이디어’인줄 착각한 것 자체가 한반도 현안에 정통하지 못하다는 자기고백인 셈이다.
조 연구위원은 “볼턴 전 보좌관이 한반도 관련 내용을 잘 모르니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이라며 “새끼 오리가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마주친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듯 볼턴 전 보좌관도 자기가 접한 사실만 말하고 있다. 엉터리인 내용이 많다”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남·북·미 3자 회담으로 확대하기 위해 싱가포르행을 희망했다는 볼턴 전 보좌관의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당시 북·미 회담 직전 청와대 관계자로 추정되는 인원들이 북측 숙소 인근에서 포착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조한범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싱가포르 북·미 회담을 성사시킨 게 우리 정부였는데 참여를 희망하는 건 당연하다”며 “문 대통령으로서는 당연히 관여해서 비핵화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성은 임성수 손재호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