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항의 러시아 국적 선박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온 것은 선원과 항구 근로자들이 바이러스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10명 중 1명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하역 근로자들의 집단감염 우려까지 낳으면서 부산항 방역에 큰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23일 국립부산검역소와 부산시 등에 따르면 전날 오후 부산 감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국적 냉동화물선 A호(3403t)의 승선원 21명 중 선장 등 16명이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5명은 음성 판정을 받고 선박에 대기 중이다.
인근에 정박해 있던 또 다른 러시아 국적 냉동화물선 B호(3246t) 선원 21명 가운데 1명도 확진 판정을 받았다. 두 선박 선원들은 배와 배 사이를 사다리로 연결해 수시로 오갔던 것으로 조사됐다.
러시아 선박 확진자들과 밀접 접촉한 사람은 부산항운노조원 등 92명이다. 배 밖 부두에서 하역 화물을 점검하던 한국 화물 검수사와 도선사, 하역업체 관계자, 공무원 등도 접촉자로 분류했다. 보건 당국은 두 선박 선원들과 접촉한 총 244명을 우선 격리하고 코로나19 진단검사 결과에 따라 후속 조치할 예정이다.
이들은 작업 중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으며 거리두기도 지키지 않았다. 거리두기가 불가능한 좁은 선박 내 작업의 특성과 마스크를 착용할 수 없는 냉동선 하역작업의 특성 때문이었다. 냉동실에선 마스크를 착용하면 습기가 차 바로 얼어버린다는 것이다. 부산항운노조 소속 근로자들은 21일 오전 8시쯤 감천항에 정박한 A호에 올라 22일까지 이틀간 하역작업을 했다. 이들은 너비 1∼2m인 선박 통로와 좁은 갑판을 수시로 오가며 러시아 확진자들과 밀접 접촉했다. 선박 위는 물론이고 냉동 어류를 보관하는 어창 안에서도 러시아 선원과 국내 작업자들은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검역 과정이었다. A호는 검역관이 직접 승선해 검사하는 ‘승선 검역’ 대신 전산으로 건강상태를 묻는 전자 검역만 시행했다. A호 측은 선원 발열 증상이나 러시아 현지에서 발열 증세를 보여 하선한 선장 등에 대해 전혀 신고하지 않았다. 검역 당국은 A호 측의 신고 내용만 믿고 검역증을 내줬다.
방역 당국은 이 선박들이 국내법을 위반했는지 들여다볼 방침이다. 검역법에 따라 외국 선박은 유증상자 유무를 반드시 신고해야 한다. 손영래 중앙재난대책본부(중대본) 전략기획반장은 백브리핑에서 “사전에 유증상자 신고가 됐어야 한다. 절차를 위반했다면 상응한 조치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선박의 무더기 확진으로 해외 유입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36일 만에 지역 감염자 수를 넘어섰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23일 0시 기준 코로나19 신규 확진자는 46명으로 해외 유입이 30명, 지역 감염이 16명이다. 해외 유입이 지역 감염보다 많은 건 지난달 18일 이후 처음이다.
부산=윤일선 기자 news828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