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달걀을 삶자

입력 2020-06-24 04:01

삶은 달걀에 대한 추억을 물으면 세대에 따라 대답이 조금씩 다르다. 1950년대 이전 태생이면 할아버지 밥상을 떠올리고, 그 이후부터 1970년대생까지는 소풍이나 기차를 추억한다. 1980년대생은 분식집의 쫄면이나 냉면을, 그 이후의 출생자는 찜질방을 말할 수도 있다.

집집이 닭을 치던 시절이 있었다. 곡물로 모이를 주어야 하니 많이 치지는 못했다. 하루 한두 개의 달걀을 거두면 할아버지 밥상에나 올려졌다. 나머지는 꾸러미에 숨겨 두었다가 장날에 내다 팔았다. 예외가 있었다. 소풍을 간다거나 먼 길을 떠나는 가족이 있으면 꾸러미에 챙겨 두었던 달걀은 집안의 천덕꾸러기라도 그의 몫이 됐다.

어머니는 소풍 며칠 전부터 가족의 눈을 피해가며 달걀 서너 개를 챙겨 놓는다. 소풍 가는 날 아침에 신문지에 꼭꼭 싼 삶은 달걀을 사이다와 함께 보자기나 가방 한쪽에 조심스럽게 넣어준다. 소풍 가는 길에 친구와 장난치고 뛰어다니다가 가방을 열어보면 달걀은 다 깨어져 있다. 그럼에도 달콤한 사이다와 함께 먹던 그 삶은 달걀의 맛은 어디에 비길 것인가.

삶은 달걀에 눈물이 묻을 때도 있었다. 도시로 공부를 하러 간다거나 일자리를 찾아갈 때 어머니는 새벽길을 나서는 아들딸의 가방 속에 삶은 달걀 몇 알을 넣어주었다. 그 삶은 달걀과 함께 꼬깃꼬깃한 어머니 쌈짓돈, 삐뚤삐뚤 써내려간 편지가 끼어 있곤 했다. 기찻간에서 먹는 그 삶은 달걀은 팍팍해서인지 자꾸만 목이 메고…. 그런 시절이 있었다.

달걀은 현재 한국인에게 가장 저렴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아무리 허름한 식당의 백반 상차림이어도 달걀 프라이는 나오고 가난한 노동자의 밤참 라면에도 달걀이 예사로이 들어간다. 산란계를 대규모로 키우는 양계장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기차의 간식 수레에는 오랫동안 삶은 달걀이 있었다. 버스 터미널 매점에도 있었다. 소풍의 즐거움과 먼 길 떠남의 슬픔이 묻어 있는 삶은 달걀인지라 그곳에 늘상 있었다. 특히 기차 여행은 옛일을 추억하게 만들고, 그래서 한국인은 기차만 타면 삶은 달걀을 먹었다. 2008년 기차의 간식 수레가 사라졌고, 그와 함께 삶은 달걀도 사라졌다. 한국인의 가슴 깊이 새겨져 있는 달걀에 대한 추억도 사라지는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엉뚱한 곳에서 이 삶은 달걀이 나타났다. 찜질방이다.

1990년대 중반 찜질방이 우리의 일상으로 불쑥 들어왔다. 기존의 목욕탕이나 사우나의 변형처럼 보이기도 하나, 용도는 그것들과 확연히 달랐다. 땀을 빼고 몸을 씻는 것은 부가적 서비스이다. 찜질방은 가족끼리 또 친구끼리 간다. 아이들에게는 놀이터이고 어른들에게는 쉼터이다. 찜질방에서 온종일 논다. 찜질방에서 뛰고 눕고 앉아 놀고 있는 가족과 친구를 그대로 야외로 옮겨놓고 보면, 소풍이다. 우리는 찜질방으로 소풍을 간다.

그때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가정 경제가 크게 위축됐던 시기였다. 서민들에게 야외로 놀러나갈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렇다고 휴일인데 집에서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족끼리 친구끼리 동네 찜질방으로 소풍을 나갔고, 소풍을 왔으니 삶은 달걀이 필요했다. 시절이 바뀌어 대부분 구운 달걀을 먹었지만 머릿속에서는 삶은 달걀이었다. 찜질방에 소풍을 나와 삶은 달걀을 먹으며 서로 위로했다. 그래, 조금씩 나아질 거야, 하고.

찜질방이 사라진다 해도 삶은 달걀은 우리의 삶터 어느 곳에서 문득 재등장할 것이다. 찜질방에서 엄마 아빠와 함께 삶은 달걀을 먹으며 행복해하는 아이들 표정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 자신들의 아이를 가지게 되면 삶은 달걀을 함께 먹으며 행복해할 것이다. 대물림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에 묻은 행복이고 사랑이다.

코로나19 때문에 찜질방에 간 지가 오래다. 소풍도 여행도 어렵다. 달걀이라도 삶아야겠다.

황교익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