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이용도와 얀 후스를 만나다

입력 2020-06-23 00:03

대학원에서 한국교회사를 전공하며 이용도(1901~1933) 목사를 만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숙명적 가난 속에서 하나님과 이웃, 민족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을 실천했다. 그의 시와 글, 일기와 편지, 설교와 사진 등이 담긴 전집(全集)이 꽂힌 도서관 서가 근처 구석진 자리에서 반복됐던 ‘이용도 읽기’는 늘 애틋한 감동을 줬다. 교회사를 전공하면서 이단 연구를 하는 내게, 이 목사의 삶과 신앙은 중요한 교훈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특히 이단 규정은 신중하고 정확해야 하며 이단 문제와 연관된 이들의 공과(功過)를 신중하고 치밀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유적지들을 탐방할 때, 독일 남부 콘스탄츠와 체코 프라하에서 얀 후스(1372~1415)를 만났다. 종교개혁의 선구자 후스는 콘스탄츠 종교회의 결정에 따라 화형을 당했다. 화형장으로 끌려가는 후스의 눈앞에서 그의 책들이 불태워졌고 군중은 조롱을 퍼부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일은, 그의 머리에 ‘이단의 괴수’라고 적힌 모자가 씌워진 것이었다.

후스가 화형에 처해진 콘스탄츠 작은 마을 어귀에 앉아, 그리고 후스 종교개혁의 중심이었던 프라하 유적지를 걸으며 많은 생각을 했다. 후스는 개혁의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세교회의 오만과 편견으로 화형당하며 이단의 괴수라는 죄목이 붙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하니 이단 연구자로서 마음은 조심스럽고 복잡했다.

내 안에 있을지 모를 편견이 두려울 때가 있다. 이단과 싸움에서 목숨을 잃은 선친 탁명환 소장을 통해 이단 문제를 바라보면서, 때로는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입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선친의 영향으로 이단 문제를 객관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나와 ‘현대종교’의 이단 연구는 교회와 사회의 공감과 동의를 얻기 위한 절박한 ‘반편견 싸움’이 되곤 한다.

다행히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역사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으며 역사가의 차별화된 경험과 환경으로 인해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는 역사 방법론을 배웠다. 이러한 상대성이 초래할지 모를 편견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는 ‘비교분석’이라는 안전장치에 대한 훈련을 받을 수 있어 감사했다. 이용도와 얀 후스의 이야기는 편견을 경계할 수 있는 표지석이 됐다.

이단 대처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편견의 위험성을 예방하기 위해, 한국 장로교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선교 초기부터 조성된 장로교세의 우세,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시작된 장로교의 분열로 오늘날 셀 수 없는 장로교단이 공존하게 됐다. 이들 교단 대부분이 개혁주의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만, 교단별로 크고 작은 교리적·정치적 차이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단 규정 기준과 현황도 다양하다.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침례교 등 다양한 교파에 대한 장로교의 배려와 협력은 한국교회 이단 대처의 공신력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됐다.

이용도와 얀 후스에게 이단이란 죄목이 붙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마다 이단이란 용어의 사용과 적용이 늘 조심스럽다. 사람을 신격화하고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며 배타적 구원관에 기초한 잘못된 종말을 주장하면서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단체들에 대한 이단 규정은 교회와 사회의 동의를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반면 오만과 편견 속에서 공신력을 상실한 이단 대처는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이용도와 후스의 삶과 죽음을 통해 배운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