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사 앞다퉈 ‘약물 재창출’ 나서… 개발 과정 일부 단축 가능해 선호
임상 시험 승인 받은 것 총 13건… 부광약품 클레부딘 등 3건 가속도
종근당 급성 췌장염약은 2상 승인, 중외제약도 ‘표적 항암제’로 도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치료제 후보로 사람 대상 임상시험이 진행 중인 약물은 전세계적으로 905건(6월 22일 미국 국립보건원 등록 기준)에 달한다. 코로나19 초창기(3월 11일 기준 53건)에 비해 17배 넘게 급증했다.
다른 질환 치료제로 이미 쓰이거나 개발 과정에 있는 약물의 용도를 변경하는 이른바 ‘약물 재창출(Drug repositioning)’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물론 혈장 치료제, 항체 치료제 개발도 활발하다. 약물 재창출 전략은 안전성이 어느 정도 검증된 약물을 타깃으로 임상시험(1~3상) 등 개발 과정을 일부 단축해 보다 빨리 치료제를 확보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선호된다.
외국에 비해 신약개발 기반이 약한 국내 제약기업들이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을 위해 약물 재창출에 앞다퉈 나서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2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코로나19 치료제로 국내 임상시험 승인을 받은 것은 13건(19일 기준)이다. 대학 등 연구기관과 제약기업이 신청한 임상시험을 합친 것이다. 13건 모두 약물 재창출에 해당된다.
여기에는 항에볼라약으로 개발되다 코로나19 중증 환자 치료제로 공식 인정받아 최근 국내 긴급수입이 결정된 렘데시비르(길리어드사이언스) 임상시험 3건이 포함돼 있다. 이 가운데 중증 환자 대상 임상시험은 긍정적 결과를 도출하며 종료됐다. 중등증(중증 보다는 덜한 증상) 환자 대상 임상시험 결과도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다.
렘데시비르와 달리 당초 기대를 모았던 말라리아치료제 클로로퀸(하이드록시클로로퀸)과 에이즈치료제 칼레트라 임상시험 2건은 중단됐다. 해외 연구에서 코로나19 치료에 약효가 없거나 심각한 부작용이 잇따라 보고돼 임상시험 참여자 모집이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극찬했던 클로로퀸의 경우 미국 식품의약국(FDA)이 긴급사용을 취소했고 세계보건기구(WHO)도 임상시험을 중단했다.
국립중앙의료원 신종감염병 중앙임상위원회도 이런 추세를 반영해 지난 2월 발표한 국내 코로나19 치료 권고안을 21일 변경했다. 칼레트라는 다른 약물 사용이 제한된 상황에서 투여 여부를 신중히 결정하고 클로로퀸은 사용을 더 이상 권고하지 않았다. 한 감염병 전문가는 “코로나19 초창기 주목받았던 약물 재창출 치료제의 옥석이 어느 정도 가려진 셈”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새로운 치료제 후보에 관심이 모아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해외에서 개발됐지만 국내 제약사를 통해 판매되는 약물 3건과 순수 국내 개발 약물 5건의 임상시험에 가속도가 붙고 있다. 이 가운데 3건은 임상 속도가 빨라 올해 안에 시험결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중앙방역대책본부 권준욱 부본부장은 최근 브리핑에서 “현재 약물 재창출 사례 중 시클레소니드, 클레부딘, 이펜프로딜 등 3개에 대한 임상시험이 연말까지 완료돼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밝혔다.
시클레소니드는 SK케미칼이 글로벌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로부터 국내 판권을 얻어 2014년부터 공급 중인 천식 치료제(상품명 알베스코) 성분이다. 지난 3월말 임상시험 승인을 받아 고려대구로병원 등 9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클레부딘은 부광약품이 자체 개발한 B형간염 치료제(상품명 레보비르)다. 지난 4월 중순부터 아주대병원 등 8곳에서 임상2상이 진행 중이다. 이펜프로딜은 영풍제약이 개발한 뇌경색·뇌출혈 후유증 치료제(상품명 페로딜)로 4월 중순부터 동아대병원 등 3곳에서 연구자 임상시험으로 진행되고 있다.
중견 제약사인 종근당은 뒤늦게 코로나19 치료제 개발에 뛰어들었다. 급성췌장염과 혈액항응고 치료제 ‘나파벨탄’에 대한 임상시험(2상) 승인을 지난 17일 받았다. 향후 3년간 코로나19로 폐렴이 온 중증 환자 100명을 대상으로 한국원자력의학원에서 진행된다.
나파벨탄은 한국파스퇴르연구소가 3000여종의 후보 물질 대상으로 스크리닝한 결과 세포실험에서 렘데시비르 보다 수백배 이상의 코로나19 항바이러스 효능을 보인 ‘나파모스타트’를 주 성분으로 한다. 나파모스타트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세포 침투 과정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는 단백질 분해효소(TMPRSS2)를 억제하는 기전을 갖는다. 최근 일본 도쿄대 연구팀도 나파모스타트에 대해 파스퇴르연구소와 유사한 수준의 항바이러스 활성을 세포수준에서 확인했다. 종근당 관계자는 “나파벨탄의 치료 효과가 확인되면 식약처에 코로나19 치료제로 긴급승인을 요청할 것이며 추후 경증 환자 대상으로 임상연구 범위를 확대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아직 임상시험 단계까진 이르지 못했지만 국내 제약사가 개발 중인 항암제의 코로나19 치료제 개발 가능성도 주목된다. JW중외제약은 최근 자사의 표적 항암제 ‘CWP291’을 코로나19 치료용 조성물로 특허출원했다.
CWP291은 암세포의 성장과 암 줄기세포에 관여하는 신호전달 물질 ‘Wnt/베타-카테닌’을 억제한다. 급성골수성백혈병과 다발성골수종 등 혈액암과 위암 등 다양한 암종을 타깃으로 한다. 지난 3월 국제학술지에 실린 ‘코로나19 스파이크단백질과 숙주의 세포수용체 ‘GRP78’ 결합 부위 예측’이라는 연구논문에서 CWP291의 작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GRP78이 코로나19의 잠재적인 스파이크단백질 결합부위로 예측됐다.
제약사는 코로나19 스파이크 단백질과 GRP78의 상호 작용을 저해시키면 바이러스 진입과 복제를 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최근 진행된 세포실험에서 CWP291이 렘데시비르나 하이드록시클로로퀸, 칼레트라 등에 비해 약 4배 높은 항바이러스 활성을 보였다. JW중외제약 관계자는 “조만간 동물실험에 돌입하는 동시에 임상시험 착수를 위해 국내기관과 협의를 추진 중”이라고 말했다.
식약처에 따르면 이들 임상시험 혹은 전단계 약물 외에도 당초 허가 사항엔 없었지만 소규모 혹은 개별 코로나19 환자 치료(치료 목적외 사용)에 승인받은 약물도 16건이 있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