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영변 핵 폐기만 제안… ‘더 달라’는 트럼프 간청 거부”

입력 2020-06-22 04:02
지난해 2월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 모습이다. 도널드 트럼프(왼쪽 세 번째) 미국 대통령이 김정은(오른쪽 두 번째) 북한 국무위원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가운데 볼턴(맨 왼쪽)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무언가를 적고 있다. AP연합뉴스

2019년 2월 27∼28일 열렸던 베트남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 비화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을 통해 공개됐다.

볼턴 전 보좌관은 오는 23일 출간되는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에서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당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영변 핵시설의 폐기 외에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았으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무언가를 추가로 내놓을 것을 간청했지만 김 위원장이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또 2019년 6월 30일 판문점에서 이뤄졌던 북·미 정상 간의 ‘깜짝 회동’은 전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아이디어였으며,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으로 이뤄졌다고 볼턴 전 보좌관은 말했다.

이 같은 내용은 수미 테리 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선임연구원이 지난 19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에 볼턴 회고록 중 2019년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과 판문점 북·미 정상회동에 대해 쓴 내용을 발췌해 올리면서 알려졌다.

볼턴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세 가지 선택지를 준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가졌던 세 가지 옵션은 ‘나는 지렛대를 가졌다’ ‘나는 서두를 필요가 없다’ ‘나는 (협상을 깨고) 걸어 나갈 수 있다’였다.

볼턴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리가 (협상을 깨고) 걸어 나가더라도 괜찮다”고 확신시켰다. 이 대목에서 테리 선임연구원은 “볼턴은 이 (하노이) 정상회담을 고의로 방해(sabotage)하기를 원했다”고 논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세 가지 잠정 결론이 나올 수 있다고 봤다. ‘빅딜’과 ‘스몰딜’ 그리고 ‘(협상을 깨고) 걸어 나가기’였다. 이 가운데 스몰딜은 극적이지 않은 데다 트럼프 대통령이 대북 제재 완화를 원하지 않아 거부했다. 빅딜도 이뤄지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핵무기들을 포기하는 전략적 결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은 결론은 ‘노딜(협상 파기)’밖에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하노이에서 (러시아 스캔들과 관련해서) 자신에게 등을 돌린 옛 개인 변호사 마이클 코언의 TV 청문회를 보느라 밤을 새웠다. 트럼프 대통령은 짜증을 냈고, 스몰딜을 타결하거나 협상을 깨고 걸어 나간다면 (코언 청문회 기사보다) 더 큰 기사가 될 수 있을지를 궁금해 했다.

볼턴은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합의에 근접했지만 김 위원장이 영변 외에는 아무것도 제안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언가를 추가로 내놓을 것을 간청했지만 김 위원장은 거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협상을 깨고 걸어나가는 것이 자신을 좋게 보이게 할 것을 알았다고 볼턴은 주장했다.

오는 23일 출간 예정인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난 방’의 표지. AP연합뉴스

지난해 6월 판문점 비무장지대(DMZ)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 위원장을 만난 것도 전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아이디어였다고 볼턴은 회고록에 썼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해 6월 28∼29일 일본 오사카에서 열렸던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당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짧은 회동을 했을 때 이 아이디어를 처음 밝혔으며, 곧 트위터로 그 내용을 올렸다.

볼턴과 당시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 대행은 깜짝 놀랐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여기(판문점 회동)에 어떤 가치도 부여될 것이 없다”면서 “이것은 완전히 혼돈이다”라고 봤다고 볼턴은 주장했다. 판문점 회동에는 어떤 실질적인 의제가 없었고, 이 회동은 모든 것이 언론 보도를 위한 것이었다고 볼턴은 덧붙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회동과 관련, ‘김 위원장이 3차 정상회담을 요청했다’ ‘김 위원장이 나를 만나기를 애타게 원했다’고 말했던 것에 대해서도 볼턴은 “이 모든 것은 터무니없다”면서 “만남을 더 바란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선 의문이 없다”고 썼다.

테리 선임연구원은 볼턴이 북·미 대화의 결론에서 “미국은 4번의 행정부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핵확산 위협을 막는 데 실패했다”고 비판한 대목에 동의했다. 그러나 테리 선임연구원은 볼턴이 자신의 대북 선제공격 주장을 반복하지는 않았지만 더 나은 북한 정책을 제시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한편 20일 AP통신 등에 따르면 미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 로이스 램버스 판사는 이날 볼턴이 회고록 출간을 계속 진행해도 된다고 결정했다. 미 법무부가 낸 출간금지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다만 램버스 판사는 볼턴이 기밀을 공개함으로써 국가안보를 위험에 처하게 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출간에 따른 수익 몰수와 형사처벌에 직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