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자와 소비자 가운데 디자인에 더 많은 관심을 주는 주체는 누구일까. 제품의 품질과 성능이 뛰어나면 외관은 부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기업도 있다. 제품력으로만 승부를 보는 게 ‘정공법’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테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 서 보면 얘기는 조금 달라진다.
비슷한 품질에 가격도 비슷한 제품이 나란히 있다면 먼저 손이 가는 것은 ‘보기 좋은 제품’이다. 디자인은 그래서 부차적인 문제인 것 같지만 때로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식품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제품들이 흔해진 시대에 눈길을 끄는 디자인이나 포장에 그려진 친근한 캐릭터가 제품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있다. 탄탄한 제품력, 그 너머까지 살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지난 16일 서울 중구 CJ제일제당센터에서 만난 CJ제일제당 디자인센터의 디자이너들도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를 했다. 이강국 디자인센터장은 “브랜드 디자이너는 그 브랜드의 전문가라고 보면 된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포장 디자인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제안하는 게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CJ제일제당 디자인센터는 식품업계에서는 독보적인 존재다. 국내에만 38명, 해외 21명까지 59명의 디자이너가 소속돼 있다. 대부분의 식품기업이 디자인 조직을 소규모로 운영하는 것과 달리 CJ제일제당은 대규모 디자인 센터에서 35개 브랜드의 4000개 이상 제품 디자인을 담당한다. 용기, 겉포장, 선물세트, 한정판 제품의 외관이 디자인센터에서 만들어진다. 지금의 디자인센터는 1995년 ‘디자인 연구소’에서 시작해 25년 동안 맥을 이어 왔다.
이 센터장은 “제품 포장은 ‘맛있어 보이게’ 디자인 해야 하고, 용기는 ‘편리하게’ 디자인 해야 한다”며 “디자이너들이 브랜드의 디테일을 잡아가고, 아무래도 CJ제일제당이 1위 기업이다보니 업계 디자인을 선도하는 면도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가공식품 포장 디자인이 몇 년을 주기로 바뀌는 편이다. 제품마다 차이가 있지만 짧게는 2~3년, 길게는 5년 정도가 지나면 외관을 새롭게 단장한다. 세계적으로도 빠른 편이다. 이 센터장은 “빠르게 변하는 트렌드에 대응하고 다양한 소비자 욕구를 살피다보면 ‘지금이 바꿔야 할 때’라는 걸 알게 된다”고 말했다.
이 흐름에서 중요한 단서가 되는 건 일종의 ‘매력’이라고 한다. 시장에서 제품 디자인의 매력이 떨어지는 게 감지되거나 경쟁 브랜드와 차별성이 좁혀지는 게 확인되면 디자인센터는 ‘재단장’을 고민한다. 제품 가격을 올리기 위한 수단은 아니냐는 질문에 이 센터장은 “가격을 올리려고 디자인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며 “요즘 메가 브랜드는 오히려 리뉴얼을 자주 안 하는 추세”라고 답했다.
제품 포장을 보기 좋게 만드는 게 중요한 일이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각 브랜드의 디자이너들이 개별 브랜드의 전문가인 만큼 디자인 관점에서 새로운 시도를 제안하기도 한다. 앞으로 5~10년을 내다보고 혁신적인 제안을 하는 CJ제일제당의 ‘미래 디자인 쇼케이스’가 그런 경우다. 2017년부터 매년 해 온 이 쇼케이스에 대해 이 센터장은 “그럴 듯하지만 실현가능성이 없는 것을 해보자는 게 아니라, 미래지향적으로 해봄직한 것을 디자인센터가 제안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CJ제일제당 디자인센터는 이를 토대로 최근 흥미로운 결과물을 내놨다. 햇반 캐릭터로 지난달 등장한 ‘쌀알이 패밀리’다. 이 캐릭터들은 미래 디자인 쇼케이스를 거쳐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지난해 초 기획부터 지난달 출시까지 1년 정도 공을 들였다. 캐릭터 디자이너에게 따로 맡기지 않고 디자인센터 소속 김유진(30), 황기남(28), 김규양(26) 디자이너가 ‘쌀알이 패밀리’를 탄생시켰다.
이 센터장은 “캐릭터를 만드는 젊은 감성은 저보다 우리 디자이너들이 더 뛰어나기 때문에 제가 최종 결정을 하지 않았다. 믿고 맡겼다”고 했다. 젊은 디자이너들의 흔치 않은 시도가 어떻게 좋은 결과로 이어졌는지 세 디자이너들을 직접 만나 들어봤다.
‘쌀알이 패밀리’는 햇반에 쓰이는 곡물들로 구성됐다. 백미, 흑미, 현미, 보리, 기장, 조, 병아리콩, 검은콩으로 여덟 캐릭터를 만들었다. 각 곡물의 특성을 캐릭터 성격에 반영했고 그 느낌을 디자인으로 구현했다. 황씨는 “햇반과 햇반에 들어가는 곡물을 더 많은 소비자들이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캐릭터를 고민하고 서로 많은 이야기도 나눴다”고 말했다.
여러 우여곡절도 거쳤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검은콩이 두피와 모발에 좋다는 효능을 알리려고 초기 디자인은 장발 캐릭터로 꾸몄어요. 그런데 비위생적으로 보인다는 의견이 있어서 모발의 효능은 짙은 눈썹으로만 표현했습니다.”(김유진씨) “캐릭터 디자인을 하다보면 디자이너가 캐릭터 표정을 하고 있을 때가 많더라고요. 그래서 그런가. 캐릭터 개발 디자이너와 캐릭터가 서로 묘하게 닮았어요.”(김규양씨)
포장 디자인은 평면적이고, 용기 디자인은 입체적이다. 캐릭터를 만드는 데는 2D 뿐 아니라 3D의 감각도 필요하다. 캐릭터 상품화가 가능한지 가늠하려면 3D까지 고려하는 감각이 필요하다. 용기 디자인을 담당하는 황 디자이너는 쌀알이 패밀리 캐릭터 상품이 나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황씨는 “캐릭터의 확장성을 생각했을 때 3D에 대한 고민이 반드시 필요했다. 단순해 보이는 캐릭터들에도 다양한 측면에서 고민하게 된다는 걸 알게 됐다”고 했다.
캐릭터가 소비자들 사이에서 확장되는 과정에서 ‘캐릭터의 세계관’이 만들어진다. 쌀알이 패밀리의 세계관은 어떤 걸까.
“처음 기획했을 때 이 친구들은 ‘밥푸리’라는 마을에 살고 있다고 봤어요. 어느 곡물과도 잘 어우러지는 백미 ‘쌀알이’는 재기발랄하고, 까칠한 식감의 현미 ‘브라우니’는 직설가형이고, 겉은 까맣지만 속은 하얀 흑미 ‘까미’는 속을 알 수 없지만 이상주의자고. 좋은 햇반이 되려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친구들이예요. 그 다음 이야기도 (소비자들과 소통하며) 계속 만들어지지 않을까요.”(김규양·김유진씨)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