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시대를 전망하는 담론이 쏟아지고 있다. 이 담론들은 대부분 자아와 관계의 상실을 가져온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재고를 전제로 하고 있다. 독일 학생들의 시위 구호처럼 ‘자본주의냐 삶이냐’의 새로운 선택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목수인 나는 이 거대담론들을 대할 때마다 ‘책상’이라는 물건을 떠올린다. 말의 공허함이 나를 목수로 내밀었다. 부유하다 스스로 휘발되는 말들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물건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때로는 지극히 사적인 물건 하나가 거대한 담론보다 더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내가 좋아하는 아름다운 문장이 하나 있다. 명창정궤(明窓淨 ). ‘볕 드는 창 아래 정갈한 책상’이란 뜻이다. 중국 송나라 시대 문인 구양수의 ‘시필(試筆)’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이후 명창정궤는 중국은 물론 조선시대 선비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공부방을 상징하는 성어가 됐다. 나는 따스한 볕이 스며드는 작은 창 아래 놓인 정갈한 책상을 상상할 때마다 기분이 상쾌해지고는 한다. 그 이미지가 좋아 ‘명창정궤’라는 명칭으로 서재 가구의 연작을 제작하기도 하고, 동명의 전시를 열기도 했다.
명창정궤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흔히 “저도 그런 서재 하나를 가졌으면 소원이 없겠어요”라고 탄식한다. 많은 사람이 서재를 가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직 한국의 가옥 구조나 생활방식은 혼자만의 오롯한 서재를 가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서재를 마련하기가 여의치 않은 사람들에게 내가 권하는 것은 ‘책상’이다. 자신만의 책상은 서재를 소유하는 시작이며, 어쩌면 그 하나로 완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책상은 클수록 좋지만, 작아도 상관없다. 좋은 의자와 짝을 이룬 책상이어도 좋지만, 좌식 책상이어도 상관없다.
조건은 하나다. 자신만의 책상.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 혼자 책을 읽고 노트북을 쓰고 때로는 커피를 마시고 또 때로는 술을 한 잔 할 수도 있다. ‘내 것’이어야만 한다. 배우자도 자녀들도 쓰지 않는 나 혼자만의 책상.
언젠가 대학교 강사 한 분이 작은 좌식 책상을 맞춰간 적이 있다. 배송을 가보니 방이 세 개인 30평대 아파트였지만, 침실을 제외한 두 방은 자녀들이 쓰고 있어 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서재가 없었다. 그는 베란다 쪽의 한켠에 책상을 놓아 달라고 했다. 후에 우연한 인연으로 그와 친해진 후 들은 이야기는 인상 깊었다. 그는 식탁이나 아이들의 책상을 쓰던 때와 달리 그 작은 좌식 책상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면 마치 혼자만의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책상에 앉아 있는 그 공간만이 유일하게 자신만의 공간으로 느껴진다고도 했다. 아이들이 출가할 때까지 아마 자신의 서재를 가질 수 없겠지만, 그때까지 이 책상 하나로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작은 책상 하나가 가지는 힘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쉬기 위해서는 온전히 혼자여야 한다. 하지만 혼자만의 공간을 가질 수 없을 때 책상은 가장 적절한 사물이 될 것이다.
책상은 자신을 대면하게 하는 물건이다. 책상은 세상으로 벗어난 눈을 스스로에게 돌리게 한다. 아울러 책상은 ‘인풋(input)’의 도구이자 ‘아웃풋(output)’의 도구이다. 책상을 마주한 사람은 무언가를 보고 읽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결국 이전에 없던 혹은 숨겨진 무언가를 끄집어낸다. 책상은 ‘나’라는 주체성의 기물적 상징이다. 나를 대면하지 않은 사람에게 관계는 불가능하다. 나는 독립된 인간 혹은 독립하려는 인간은 반드시 자신만의 책상을 소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에서 맞닥뜨리는 상실과 괴리감에 대한 해법을 찾는 이들에게 그리고 팬데믹으로 도래한 ‘집콕시대’의 일상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에게 나는 묻는다.
“당신은 당신만의 책상을 가지고 있습니까?”
김윤관 김윤관목가구공방 대표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