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에 처음으로 신경안정제를 먹었다. 심장이 제멋대로 뛰고 호흡이 불안정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이 오작동을 일으키는데 정신이라고 멀쩡할 리 없었다. 그 무렵 밤마다 미친 듯이 채워 넣었던 일기장을 보면 분노와 불안으로 비약하는 생각들 사이사이 스스로를 더 어두운 궁지로 몰아넣지 못해 안달 나 있던 내가 보인다.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해 해야 할 것들의 목록을 강박적으로 적어가며 비참한 오늘을 버리고 깨끗한 내일만 다짐하던 안쓰러운 나도 보인다. 지금은 많은 것이 좋아졌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약을 먹고 나을 수 있는 종류의 상처는 아닌 것 같다. 병든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 또 다른 마음을 길러 아픈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되는 것.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는 말이 의미하는 건 좀 더 많은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지금 품을 수 있는 것을 품을 수 없게 되는 날이 반드시 올 테고 그때가 되면 또다시 고통을 호소하겠지만 마음은 식물처럼 끝없이 자랄 수 있다고 믿는다. 너무 많이 절망하진 않는다.
서효인 시인과는 조금 다른 지점에서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를 읽었다. 이 책은 사회적으로 부족할 게 없어 보이는 여성이 오랜 시간 동안 겪어 왔던 조울의 시간을 독자들과 공유하는 이야기이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조울’이라는 무자비한 괴물의 폭압에 맞서는 과정을 하염없이 지켜보며 가슴 졸여야 했던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막을 건넌 건 ‘삐삐언니’ 혼자가 아니다. 딸을 폐쇄 병동에 입원시킨 뒤 써 내려간 아버지의 눈물 섞인 편지라든가 카펫을 보고 사람이라 우겨대는 언니를 바라보는 동생의 무너지는 마음이라든가…. 사랑하는 딸을, 싱그러운 언니를, 괴물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겪을 법한 추위와 더위를 상상하며 같이 아파할 가족들은 또 얼마나 많은 마음을 길러야 했을까. 3개월 전부터 환자의 가족으로 살고 있다. 예고 없이 찾아온 일상의 변화 앞에서 나는 좀 방황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방황하는 자신에 대한 죄책감으로 조금 우울한 것 같기도 하다. ‘삐삐언니’를 향한 가족들의 지지와 응원을 보면서 말 없는 위로를 받았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뜬금없이 ‘2050 거주불능지구’가 떠오른 건 순전히 ‘우울’ 때문이다. 기후 변화가 인간의 삶에 미칠 수 있는 열두 가지 시나리오를 부챗살처럼 펼쳐서 보여주는 이 책은 기후 변화가 가져오는 실질적인 변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이유를 다각적으로 분석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후 변화에 대한 예언서인 동시에 아직 벌어지지 않은 미래의 위기에 대한 인간의 판단, 그러니까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근원적으로 질문하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 이때 등장하는 표현 중 하나가 바로 ‘기후 우울’이다. 아무리 소리치고 외쳐 봐도 사람들이 귀 기울이지 않고 세상이 꿈쩍하지 않는 데 대해 전문가 집단이 느끼는 무력감의 실체를 표현한 말이 기후 우울이다. 우울은 알려진 바와 달리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는 말이 있다. 지구의 현실을 직시한 죄로 그들은 우울하다.
전문가들의 기후 우울에서부터 좀처럼 인식을 바꾸지 않는 사람들의 편향된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기후변화를 둘러싼 인간의 마음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저자가 결론을 어떻게 맺을지 궁금했다. 이 책의 결론이 지구 문제뿐만 아니라 내 인생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것 같았던 기대감도 한몫했다. 결론에 해당하는 4부의 제목은 ‘인류 원리, 한 사람처럼 생각하기’다. 지구를 한 사람처럼 생각하면 1도의 체온 상승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없다. 2도의 상승이 불러올 변화를 아직 오지 않은 일이라고 밀어둘 수도 없다. 고열을 시작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빠졌는지 한두 번쯤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구의 고통에 공감하라는 이야기가 너무 낭만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후 변화로 인해 우리가 마주할 세상은 “새로운 일상(new normal)이 아니라 일상의 상실”이 될 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삐삐언니가 건넌 조울의 사막이란 적응하고 버틸 수 있는 새로운 일상이 아니라 일상을 허락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 완전한 상실 앞에서 한 사람의 고통을 상상하듯 지구의 고통을 상상해 보자는 낭만적인 말이 이토록 절박하고 간절한 제안으로 들리는 것이 내가 너무 몰입한 탓만은 아닐 것이다.
박혜진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