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 미국 전역을 달군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미 현대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사건으로 평가된다. 미국 사회에 누적됐던 차별과 불평등에 대한 분노가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을 계기로 폭발했다는 평가다. 미 언론들은 코로나19 확산과 경제 위기, 인종차별 문제가 한꺼번에 터진 현 상황은 과거 아픈 역사의 메아리라고 분석했다.
시위를 촉발한 건 8분 남짓한 동영상이었다. 17살 흑인 소녀가 찍은 이 영상에는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무릎에 목이 눌려 의식을 잃는 장면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소녀는 지난달 25일 위조지폐 사용 신고가 들어온 편의점에 들렀다가 4명의 백인 경찰관이 차에 있던 플로이드를 끌어내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지난 11일(현지시간) 지역 일간 스타트리뷴과의 인터뷰에서 “이 영상이 전 세계적인 항의 시위를 촉발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플로이드가 숨진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시작된 플로이드 사망 항의 시위는 미국을 넘어 영국 프랑스 브라질 등 다른 나라로도 번졌다.
인종차별 반대 시위는 오는 11월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치명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시위 내내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고수했는데 정작 시위의 본질인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선 침묵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줄곧 시위대에 극좌 세력을 일컫는 ‘안티파’ 딱지를 붙여 이념 대결로 몰아가려고 했다. 지난달 말 시위대가 백악관을 향하자 지하 벙커로 대피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고 이를 만회하기 위해 ‘성경 이벤트’를 벌였다가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미군 ‘투톱’이 트럼프 대통령과 갈등을 빚는 모습이 노출되기도 했다.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은 워싱턴 시위대 진압을 위한 대통령의 군대 동원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마크 밀리 합참의장은 백악관 인근 세인트존스 교회에서 진행된 트럼프 대통령의 사진 찍기 행사에 동행한 것에 대해 실수라고 인정했다.
시위 이후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도 뚝 떨어졌다. 미국의 선거전문 매체 ‘538’이 각종 여론조사를 취합해 분석한 결과, 지난 10일 기준 트럼프 대통령 지지율은 41.0%로 나타났다. 취임한 지 3년4개월이 된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낮았던 역대 대통령은 해리 트루먼(39.6%), 지미 카터(38.5%), 조지 H W 부시(35.7%) 3명뿐이다. 이 가운데 카터와 부시 대통령은 재선에 실패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흑인 사망 시위 및 코로나19 사태를 둘러싼 트럼프 대통령의 대응이 공화당 안에서 11월 선거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키우고 있다”고 전했다.
인종차별 시위는 역사적 인물에 대한 재평가로도 번졌다. 노예제나 인종차별과 관련된 인물들의 동상을 훼손하는 일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영국에선 윈스턴 처칠 전 총리 동상에 ‘처칠은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서가 새겨졌고, 벨기에에서는 옛 국왕 레오폴드 2세 동상이 시위대에 의해 훼손된 뒤 철거됐다. 영국 브리스틀에서는 17세기 노예 무역상이었던 에드워드 콜스턴 동상이 강물에 내던져졌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 동상도 수난을 피해가지 못했다. 시카고 언론에 따르면 워싱턴파크에 있는 116년 된 워싱턴 전 대통령 동상이 훼손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동상 위에 페인트로 ‘노예 소유주(Slave Owner)’ 같은 낙서가 돼 있고, 동상 머리 부분에 백인우월단체인 KKK를 연상시키는 흰색 두건이 덮여 있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끈 영웅으로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대농장 지주로서 노예를 소유했던 과거가 있다. 미국인들 사이에선 노예 소유주 동상을 모두 철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역사의 일부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부딪히고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도 텔레그래프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는 문제의 상징이 아닌 본질을 다뤄야 한다”며 “현재를 겨냥해야지 과거를 다시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 정치적으로 올바른지 끝없는 논쟁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플로이드 시위로 촉발된 또 다른 움직임은 미 언론들이 자정 작업에 나섰다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인종 관련 보도에 문제가 없는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인종 관련 보도를 소극적으로 처리하지 않았는지, 채용 과정에서 특정 인종이 차별받은 건 아닌지 내부적으로 의문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표출된 분노가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꿀지는 미지수다. 그렇지만 시위대의 ‘경찰 개혁’ 요구에 밀려 정치권이 목조르기 금지, 공무원 면책특권 제한 등 경찰 개혁 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다만 공화당과 민주당의 입장이 달라 법제화되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권지혜 기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