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호용한 (9) 쌀 떨어져 국수로 떼운 날 집사님이 쌀 포대 들고와

입력 2020-06-18 00:07
호용한 목사가 1994년 독일 뮌헨한독교회에서 목회할 때 가족들과 함께 뮌헨 근교 슈타인베르그 호숫가를 방문해서 사진을 찍었다.

아내에게 호기롭게 “쌀을 사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양식을 기다리자”고 말한 후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를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나를 목회자로 부르시고 어린 시절 나의 꿈을 잊지 않으시고 독일까지 인도하셨으니 온전히 책임져 달라는 기도였다.

그날 저녁 우리 가족은 국수를 삶아 먹었다. 아이들은 집에 쌀이 떨어졌는지도 모르고 오랜만에 국수를 먹어서 좋다고 조잘댔다. 밤 9시쯤 됐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독일에서는 사전 연락 없이 다른 집을 방문하는 게 드물기에 누가 왔을까 싶었다. 문 앞엔 찬양대 지휘자이신 서명정 집사님이 10kg짜리 쌀 네 포대를 들고 서 있었다.

“기도하는데 자꾸 목사님 댁에 쌀을 가져다드리라는 마음이 드는 거예요. 늦은 시간이라 내일 올까 하다가 그래도 생각난 김에 가자 싶었어요.”

집사님은 자동차가 없어 택시를 타고 쌀을 가져오신 참이었다. 차 한 잔 드시고 가라는 말에 집사님은 늦은 시간에 찾아와 죄송하다며 서둘러 나섰다. 쌀 포대를 창고로 옮기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나님께서 이렇게까지 나를 주목하고 계시구나 싶었다. 새로운 담임목사 굶을세라 그 추운 겨울밤에 택시까지 타고 쌀을 가져온 집사님의 사랑도 절절히 느껴졌다. 아내 역시 소파에서 엉엉 울고 있었다. 국수로 허기진 밤이었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니 한없이 배가 불렀다.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또 다른 사랑으로 흘러가게 하고 싶었다.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에게 주신 쌀을 누군가에게 나누는 일이었다. 누구에게 나눌까 살펴보던 중에 한국인 유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으레 유학생들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알지만, 독일에 온 유학생들은 그렇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학비가 필요치 않은 대신 생활비가 많이 들어갔다. 그래서 유학생 중에는 밥을 굶는 이들이 적잖았다.

쌀 네 포대로 가난한 유학생들에게 쌀을 나누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이 생겼다. 약속이나 한 듯이 교인들이 우리 집을 방문할 때마다 쌀을 가져왔다. 나는 교인들이 쌀을 가져오는 족족 가난한 유학생들을 먹였다. 우리 교회 교인이 아니더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쌀 나누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집 쌀 곳간이 열리자 교인들도 하나둘 쌀 나눔에 동참했다. 저마다 재정적으로 여유로운 형편은 아니었지만, 어려움 가운데서도 교인들은 자기들보다 더 어려운 유학생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독일에서 만 5년을 살았다. 처음에 독일에 갈 때는 유학과 목회를 동시에 꿈꿨지만, 실상 목회를 하면서 학위 공부를 하기는 쉽지 않았다. 또 내가 살던 뮌헨은 보수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나와는 거리가 먼 자유주의 신학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차선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후 총신대 대학원에서 미국 개량들 신학대(RTS)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과정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든 삶의 길을 인도해 주셨다.

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