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여섯 살 연년생 형제는 어벤져스 군단도 당해낼 수 없는 특급 개구쟁이 조합이다. 편의점에 들어올 때부터 조마조마했다. 붙거니 쫓거니 장난치던 녀석들이 끝내 일을 쳤다. 큰 애가 작은 애를 밀쳤는데, 시식대에서 라면을 먹던 손님과 튕기듯 부딪친 것. “녀석들, 얌전히 있지 못해!”하며 뛰어가려던 찰나, 손님의 행동이 나를 멈칫 가두었다. 곧장 아이를 일으켜 세우더니, “얘, 괜찮니?”하고 묻는 것 아닌가. 기억 속에 돋을새김처럼 잊히지 않는 풍경이다.
수년간 편의점을 운영하며 늘 궁금한 점이 있다. 사람이 사람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태도는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내게 달려와 부딪친 아이에게 화내지 않고 “괜찮니?”하고 물어보는 심성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것은 단기속성처럼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몸에 스민 오래된 습관. 너에게서 나에게로, 받은 사람에게서 다른 이에게로, 조용히 전파되는 온정의 바이러스 아닐까.
눈과 귀를 씻고 싶은 소식이 들려오는 요즈음. 부모가 자식에게, 한동네 어른이 아이에게, 주민이 경비원에게 했다는 행동을 듣다 보면, 인간이 인간에게 과연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정신이 아뜩해진다. 아홉 살짜리가 높은 건물 지붕을 타고, 아찔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며 죽음을 각오하고 옆집으로 기어 넘어갔을 때 심정은 어땠을까. 그 아이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이 편의점이었다는 소식에, 지문조차 남지 않은 손을 벌벌 떨며 밥을 먹었다는 이야기에, 왈칵 울고 말았다. 오렴, 언제든 편의점으로 오렴, 꼬옥 안아주고 싶구나.
점주 몇 명과 모여앉아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우리 마음은 무거워진다. 편의점에는 아동급식카드를 들고 오는 아이들이 있다. 저소득층 자녀들이 굶지 말라고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돈인데, 아이들은 대체로 편의점으로 온다. 어린이가 직접 사용해야 하고, 정해진 먹거리만 구입 가능하다. 원칙은 그러한데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부모라고 하면 믿지 않을 수 없고, 다른 상품으로 대체해 달라면 다툼이 귀찮아 그렇게 해주기도 한다. 앞으로 어린이 손님들에게 더 시선을 둬야겠다고 말하며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학대를 막는 것은 주위의 관심으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며 작은 책임을 돌아본다.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이 빨리 널리 퍼지고, 그래서 우리는 유독 그것을 많이 듣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밝고 아름다운 사연을 더 많이 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우리는 또 다짐한다. ‘괜찮은’ 세상이란 내 아이가 아닌 다른 아이에게 “괜찮니?”라고 물어보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이웃에게 “괜찮습니까?”라고 자꾸 말을 걺으로써 세상은 말한 대로 괜찮아진다.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숨겼을 때 창조주는 물었다. “아벨은 어디 있느냐.” 오늘도 양심은 우리에게 묻는다. 네 동생은 어디 있느냐. 이웃은 어디 있느냐. 우리는 비록 카인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아벨을 지키는 자가 돼야 한다. “동생은 저와 함께 여기 있습니다”라고 웃으며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봉달호(작가·편의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