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낙에도 그랬지만, 어떤 집에 살고 어느 지역에 사느냐가 사람의 신분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돼 버렸다. 적어도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가보다 훨씬 중요해진 것 같다. 시간이 흐르고 권력의 주도권이 바뀌어도 개선되지 않고, 심지어 더 심각해지기도 한다는 것은 여간 우울한 일이 아니다. 서울 송파구의 비싼 아파트에 사는 어떤 사람이 딸을 시집보낼 때까지는 그곳에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 아무도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이런 말을 듣고 놀라는 사람보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의 수가 아마 더 많을 것이다. 고위 공무원이나 국회의원, 심지어 전라도나 경상도에 지역구를 둔 의원들조차 서울의 특정 지역에 비싼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걸 누가 모를까. 아이들조차 아파트 브랜드를 따져 가며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도 들린다.
최근에 읽은 김혜진의 소설 ‘불과 나의 자서전’은 낙후지역 재개발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우리 사회의 이런 문제를 서슴없이 지적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남일동의 주민들은 남일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다. 남일동에 사는 것을 숨기려 하고 애써 부정하려고 하는 심리가 가령 이런 대화를 통해 표현된다.
“우리는 남일동에서 살았다고 할 수도 없다. 어쩔 수 없이 몇 년 그 동네에 있었던 거지. 어디 가서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라.” 그리고 소설에는 이런 문장도 나온다. “우리 가족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남일동을 벗어났습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우리가 남일동에 살았던 시절을 완전히 잊은 사람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중앙동 사람으로, 중앙동에서만 살아온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화자인 ‘나’의 가족이 남일동을 벗어난 것은 놀랍게도 그들이 다른 지역으로, 그러니까 중앙동으로 이사했기 때문이 아니라 행정구역 개편으로 남일동이 반으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운 좋게 그들이 살던 곳이 중앙동으로 편입됐을 뿐이다. 소설에는 남일동 일부가 중앙동으로 편입되는 행운, 혹은 기적이 아니었다면 그곳을 벗어나는 일은 평생 불가능했을 거라는 문장이 여러 차례 강조돼 나온다. 행정구역 개편이 이뤄져서 다른 동 주민이 됐을 뿐인데도 남일동에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 소설은 한국인들 속에 뿌리 내린 집의 신화와 불평등을 고발한다. 집과 지역의 상징성이 그만큼 압도적이라고 해야 할까.
이쪽 정권이나 저쪽 정권 할 것 없이 행정부의 높은 분들과 청와대 인사들은 왜 하나같이 특정 지역에 몰려 사는 것일까. 남일동이 남일동에 사는 사람들을 규정하는 것처럼, 그들이 사는 특정 지역이 그들을 규정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는 보수와 진보가 싸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구도는 이미 가진 자들과 어떻게 해도 가질 수 없는 자들로 나뉜 견고한 신분사회를 은폐하기 위해 이미 가진 자들이 만든 일종의 알리바이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터무니없다고 부정하기 힘들다.
살고 있는 집의 형태와 거주 지역에 따라 사람이 평가되고 판단되는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삶의 공간인 집이 가장 효과적인 재테크 수단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사회를 제대로 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우연한 행운이나 기적 말고는, 그러니까 개인의 성실한 노력으로는 타고난 환경을 바꿀 수 없도록 구조화된 사회, 고착된 불평등의 사회를 선진 사회라고 할 수 없다.
어떻게 해도 자기 울타리를 벗어날 수 없다고 체념한 상태에서의 노동에 활력이 있을 리 없다. 가능성과 기회가 보장된 사회에 활력이 넘친다. 우리의 지향점은 이미 가진 자들과 어떻게 해도 가질 수 없는 자들의 견고한 분리가 아니라 이미 가진 자들과 아직 가지지 못한 자들의 활발한 어울림이어야 한다. 우리가 번번이 실망하면서도 정부의 부동산 대책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