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미국이 추진하는 ‘반중동맹’에 동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아온 EU가 중립 선언을 통해 미·중 갈등 구도에 끌려들어가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말 폭탄을 주고받던 미·중 양국도 이번 주 하와이에서 고위급 협의를 가질 것으로 알려졌다. ‘신냉전’이라고 불릴 정도로 고조된 미·중 갈등이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15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호세프 보렐 EU 외교안보 고위 대표가 전날 EU 홈페이지에서 미국과 중국 중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전했다.
보렐 대표는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EU는 범대서양 반중동맹에서 빠지겠다”며 “중국과의 조직적 라이벌(systematic rival) 구도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보렐 대표는 또 “미·중 갈등이 세계 정치의 주요한 축으로 자리잡으면서 유럽은 어느 쪽 편을 들 것이냐에 대한 압박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면서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EU, 한국 등 동맹국들을 대상으로 반중동맹 동참 요구를 해온 가운데 EU가 이를 거부하며 중립 노선을 천명한 셈이다.
앞서 EU는 중국을 향해 “코로나19 관련 가짜뉴스를 유포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내는 등 비판적인 입장을 유지해 왔다. 지난달 18~19일 열린 제73회 세계보건총회(WHA)에서는 중국을 겨냥한 코로나19 관련 독립조사 결의안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러나 보렐 대표는 이번 글에서 “세계에서 중국의 역할은 날이 갈수록 거대해지고 있다”며 “팬데믹과 기후변화, 지속가능한 발전 등 여러 분야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맡게 될 중국과 협력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과 같이 힘든 상황에서 우리는 EU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두고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렐 대표의 이 같은 발언은 15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EU 각국 외교장관 간 화상회의를 앞두고 나온 것이어서 눈길을 끈다. 또 보렐 대표의 발언이 EU 회원국 전체의 뜻과 일치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된다.
유럽과의 갈등을 부담스러워하는 중국은 지속적으로 “유럽은 중국의 조직적 라이벌이 아니다. 우리의 관계는 파트너십에 기반한다”고 주장해 왔다. 보렐 대표의 이번 발언은 중국의 구애에 대한 화답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SCMP는 이에 대해 “기존에 진행되던 미·중 무역전쟁과 지정학적 알력 다툼의 여파에서 벗어나려는 중국과 EU의 의도가 일치했다”고 분석했다.
이날 CNN방송 등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이번 주 중국 측 고위 인사와 하와이에서 만나 양국 간 긴장 완화와 갈등 해소 방안 등을 논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중국 측에서 참석할 인사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으나 중국 외교 실무 사령탑인 양제츠 외교담당 당정치국 위원이 유력하다는 관측이다.
폴리티코는 양측 회담 소식을 보도하며 “트럼프 대통령은 그간 재선을 의식해 중국을 공격해 왔지만 이제는 경제 회복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며 “특히 1차 미·중 무역합의가 아직 이행되지 않은 상황이라 갈등을 지속하기에는 매우 복잡한 상황”이라고 배경을 분석했다.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