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햇살이 제법 덥게 느껴지는 시간에 어린 꼬마가 싱싱카를 타고 앞서가며 뒤따라오는 엄마를 확인하느라 연신 뒤를 보며 내 앞을 지나간다. 꼬마 나이가 7~8살은 초등학교 1학년쯤 되어 보인다. 나의 8살. 6월이 되면 언제나 잊어지지 않고 생각이 난다.
1950년 6월 25일. 6.25사변이 일어나던 해 나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그러니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주의 항복에 의해서 해방 되던 해 나는 국민학교 1학년이었으니까 나라를 빼앗겼다 광복된 나라에서 우리말 우리 한글을 쓸 수 있었던 첫 번째 교육을 받게 된 행운아인 셈이다.불행하게도 통일된 조국이 아닌 미·소 양진영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38선이라는 가시망이 처지고 분단된 나라가 되어 우리민족의 비극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1950년 6월 25일 국민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당시 어린 국민학생들을 집합시켜 소년단을 만들어 공산주의에 대하여 연일 교육을 시켰다. 공산주의는 빈부의 격자가 없는 평등한 사회요 국가라고 강조하면서 철저한 사상교육을 시켰다. 또 토지를 몰수해서 모든 농민들에게 균등하게 분배시켜 준다는 미명하에 일련의 작업을 추진하던 중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후퇴하게 되었다.
그때는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이라 가난에 시달리던 어린시절에 공산주의의 감언이설에 대해 아주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후 조금 알게 되었지만 공산주의와 그리고 자본주의, 민주주의에 대해 비교하게 되고 특히 공산주의의 무신론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고 신앙과 양심의 자유도 역시 보장되며 국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종교의 자유란 있을 수 없고 오직 노동자, 농민을 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 휴전협정 일명 정전협정(1953년 7월 27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는 정지,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등 각 분야에서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국가기록원에 의하면 한국전쟁으로 전사자 137,889명, 부상자 450742명, 포로 및 실종 32,838명이 있으며 UN군 전사 40,670명이며, 부상 104,230명, 실종/ 포로 9,921명이 된다고 한다.
그 외에도 피난민 기타 민간인 실종학살 등 수없이 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입게 되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전쟁의 피해인가. 그리고 참전국들의 피해와 은혜에 대한 보답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한 민족이 하나 되지 못하고 있는 나약함의 현실을 언제까지 방관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할수록 약소국가의 비애를 느끼게 한다.지금의 현실은 통일이나 남북간의 대화나 이와 관련하여 실행하려는 모든 행위들은 자칫하면 보수나 진보 논리로 국론만 분열되고 정치는 실종된 채 정쟁만이 존재하니 통일은 언제쯤 가능한 것인가?
김형령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성서보수 증경총회장·인천형성훈련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