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칠 논쟁으로 번진 反인종차별 시위

입력 2020-06-15 04:07
12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의회광장에 위치한 윈스턴 처칠 동상 주위로 임시 보호막이 씌워져 있다. AFP연합뉴스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의 손녀 엠마 솜스가 13일(현지시간) “시위가 계속될 경우 할아버지의 동상을 박물관에 보관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며 우려를 표했다. 미국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으로 촉발된 인종차별 항의 시위가 대서양 건너 영국에서 국민 영웅 처칠에 대한 논란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이다.

솜스는 이날 BBC방송 인터뷰에서 “지금 우리는 역사를 완전히 현재의 관점으로만 보는 곳에 와 있다”며 “이 나라에서 통합의 인물로 간주돼왔던 할아버지가 이번 인종차별 논쟁 국면에서 ‘인종주의자의 상징’처럼 돼버린 데 대해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는 그의 인생 장부에 나쁜 것보다 좋은 것을 한없이 더 많이 가진, 강력하고 복잡한 남자였다”고 강조했다.

앞서 지난 7일 런던 시위대는 의회광장 앞에 세워진 처칠의 동상에 ‘흑인 목숨도 중요하다’는 문구가 적힌 종이를 붙이고 인종주의자라는 낙서를 새겼다. 이들은 처칠은 영연방의 식민주의를 지키기 위해 인도 등지에서 인종차별을 일삼은 인물이라며 2차대전에서 나라를 구한 구세주로만 생각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처칠 동상 주위에는 현재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간이 보호막이 씌워진 상태다. 솜스는 보호막의 필요성에 대해 수긍하면서도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할아버지의 동상이 사라진다면 의회광장은 더 가난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처칠 논쟁’은 극우파의 반동 시위를 불렀다. 동상이 있는 의회광장에는 이날 수천명의 극우파 백인시위대가 영국 전역에서 상경해 폭력 시위를 벌였다. 처칠 동상을 보호하겠다는 명분하에 모인 시위대는 “윈스턴 처칠, 그는 우리 자신과 같다” “외국인들로부터 영국 역사를 지키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이들은 처칠 동상 훼손에 대한 복수로 의회광장에 함께 세워진 넬슨 만델라와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대와의 충돌을 우려한 런던 경찰이 막아서자 이들은 술병과 화염병을 투척하고 난투극을 벌이며 격렬히 맞섰다. 경찰관 6명이 부상을 입었고, 시위대 100여명이 불법 무기 소지, 경찰 폭행 등 혐의로 현장에서 체포됐다.

‘처칠은 영웅’이라며 동상 훼손에 분개했던 보리슨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극우 시위대를 강하게 비난했다. 그는 트위터를 통해 “영국 거리에 잔혹한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폭력이 설 자리는 없다”고 강조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